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양립할 수 있는 개념인가에 대한 논쟁은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붕괴로 종식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아시아적 가치나 아시아적 정치 경제체제가 동아시아 국가들이 고도성장을
이룩한 원동력이라는 분석도 대두된 바 있다.

그러나 최근의 국제 금융위기로 이 지역의 경제성장이 둔화된 이래 이러한
논의도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아시아적이란 표현은 민주주의에 대한 제약이나 과다한 정부간섭을
암묵적으로 의미하는 것이다.

정부주도의 경제정책은 자원을 동원하는데 효과적이어서 단기적으로는
성공할 수 있으나 이러한 정책은 경제주체의 자발적 참여에 의한 경제체질의
강화나 생산성향상을 끌어내지 못하기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아시아 경제도 결국은 세계 경제의 일부이며 세계와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세계경제가 급속히 글로벌화하고 있다는 것을 아시아의
지도자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비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새정부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경제운영의 기본 철학으로 삼겠다고
천명하였다.

지극히 당연하고 올바른 판단이다.

시장은 수많은 수요자와 수많은 공급자가 존재해야 원활히 작동한다.

민주주의도 수많은 국민이 참여해야 활발히 운영된다.

자율과 책임이란 개념도 시장에서의 경제주체와 민주체제에서의 국민에게
동등하게 적용되며 이러한 의미에서 두 개념은 양립할뿐 아니라 상호보완적
기능도 한다고 볼 수 있다.

선진국클럽이라 일컬어지는 OECD의 3대 기본원칙이 다원적 민주주의,
시장경제, 인권존중임을 볼 때 위의 두 개념은 선진국이 되기 위한 조건임을
알 수 있다.

이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민주주의에는 무엇이 문제이며, 우리의
시장에는 무엇이 문제인가를 올바로 파악하는 것이다.

상의하달식 의사결정이 횡행하는 권위주의 체제에서는 민주주의가 정착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정부가 경제주체들의 활동을 간섭해서는 시장경제가 활성화될
수 없다.

소수의 의견을 존중하고 약자의 말을 경청하는 관행이 정착될 때 비로소
민주주의가 정착되는 것이다.

또한 경제의 규범을 정하고 이의 준수여부를 엄격히 감독하는 본연의
임무를 벗어나 경제활동의 결과를 규제하는 데에 정부가 관심을 가져서는
시장이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

시장활동의 결과인 가격을 규제하여 인플레를 잡겠다는 정책이 결코
실효를 거둘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최근 재벌개혁에 대한 논의가 초미의 관심사로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상적인 기업상을 정립하여 이를 강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미 매출액의 절반이 해외활동에서 실현되는 기업에 국내여건을 고려하여
설정한 기준에 맞추어 조직과 행태를 바꾸라는 것은 효과적이지 못하다.

문제의 해결은 언제나 과거 교정적이기 보다는 미래지향적 수단이라야
실효를 거둘 수 있다.

재벌개혁은 수많은 방안중에서 상호지급보증 해소, 국제기준에 부합하는
결합재무제표 작성, 그리고 적대적 인수-합병(M&A)허용으로 충분히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다.

재벌활동의 결과를 규제하는 것보다는 행동규범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경제가 개방되고 잠재적 경쟁자의 참입이 제도적으로 보장되어 시장의
국제경합성이 유지되는 한 다른 수단을 복합적으로 수행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민주국가에서 이익집단간 이해상충은 제도개혁의 결정적 걸림돌로
작용한다.

이러한 딜레마를 해결하는 대안이 국제규범의 적용이다.

글로벌 경제에서 국제규범의 중요성은 제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국제규범이 만병통치약이라는 것이 아니라 이의 적용은 우선 세계와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피할 수 없는 선택이며, 동시에 정책의 일관성을
확보시켜 경제의 불확실성을 낮춤으로써 경제활동을 정상화시키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국제규범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눈을 밖으로 돌려야 한다.

현재 우리의 국내제도가 국제규범과 상치하는 점, 더 나아가 신국제경제
질서형성과정에서 제기되는 새로운 이슈들을 파악해야 한다.

글로벌 경제에서는 선진국들의 문제가 곧바로 세계 문제로 등장하기에
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새정부의 정책기조에는 민주와 시장에 더하여 글로벌이라는 개념을
추가할 것을 제안한다.

세계는 지금 다국적기업이 지배하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 전체 교역량의 60%를 다국적기업이 담당하고 있다는 통계치가 이를
극명히 대변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앞으로의 경제정책 화두는 국제규범과 다국적기업이
되기를 기대한다.

국제화가 되면 문화와 경제가 예속된다는 부정적 시각에서 벗어나 우리의
경제와 문화를 세계에 전파시키기 위해서 다국적기업을 적극 수용하고
활용한다는 긍정적 발상을 가져야 할 때이다.

(한국경제신문 1998년 3월 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