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 박사는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안정만 확보된다면 아시아 지역의 성장 추세가 지속될 것으로 내다봤다.

특히 한국의 경우 높은 교육수준과 근면성 덕분에 조만간 금융위기에서
벗어나 고속성장을 거듭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대기업 구조개편과 관련, 토플러 박사는 "지금까지 한국 대기업들은
경제발전을 위해 나름대로의 역할을 수행해 온 점은 인정한다"며 "그러나
오는 21세기 "제3의 물결"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선 과거 산업사회시대에나
적합했던 기업조직과 문화를 과감히 고쳐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양준용 LA 특파원이 앨빈 토플러 박사를 만나 IMF 체제하에서 한국경제와
기업들이 추구해야할 새로운 성장전략과 과제에 대해 들어봤다.

< 편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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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위기로 한국을 비롯한 동남아 국가들이 심각한 경기침체를 겪고
있습니다.

아시아 경제에 대한 장기전망은 어떻습니까.

또한 한국이 금융위기에서 벗어나 다가오는 21세기 세계경제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 것으로 보는지요.

"금융위기로 아시아 지역의 경제성장이 멈출 것으로 보진 않습니다.

다만 우려되는 것은 이 지역의 정치불안정입니다.

이번 사태가 국민들의 불만표출로 쿠데타 폭동 등으로 이어질 경우
상황이 급변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정치불안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등 어느 나라에서든 생겨날 수
있습니다.

특히 중국은 주목할 필요가 있죠.

금융위기의 직접적인 영향권안에 있지는 않지만 이와 상관없이 중국에는
정치불안요소가 항상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같은 정치불안만 완전히 해소될 경우 아시아경제는 지난 수년간
보여줬던 것처럼 고속성장을 지속할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한국의 경우 더욱 그렇습니다.

국민들의 높은 교육수준 근면성 등이 이를 강하게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이미 반도체 등 첨단 산업분야에서 세계시장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왔습니다.

한국이 금융위기에서 벗어나 다시금 강한 성장세를 보여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일부 경제 전문가들은 이번 금융위기는 아시아 경제개발모델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반증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

박사님도 같은 생각인지요.

"아시아 성장한계론을 내세우고 있는 폴 크루그먼 MIT대 교수를 두고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이는 지나치게 경제적인 측면만을 고려한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경제발전은 전적으로 경제적인 요소에만 의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정치 문화 사회 등 다양한 요소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가능했습니다.

물론 이같은 요소들을 통계로 수치화하기는 불가능합니다만 경제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온 것만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겁니다.

따라서 노동력 등 경제적 요소의 집중 투입으로 지금까지 아시아경제가
성장했고 이제 그 요소들의 고갈로 성장한계에 도달했다는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고 봅니다.

여전히 아시아는 수치화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자원과 두뇌력을 갖고
있어 미래는 밝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일본이 저지른 실수를 되풀이해선 안될 것입니다.

일본의 경우 정보와 첨단 기술을 제조업분야에 집중 투자, 수출주도형의
성장모델을 개발해 눈부신 경제발전을 일궈냈습니다.

하지만 최근 일본은 이같은 성장모델을 제조업분야에서 했던 것처럼
금융 및 서비스분야에서도 똑같이 적용해 큰 낭패를 보고 있습니다.

한국 등 여타 아시아 국가들은 일본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일부 전문가들은 아시아가 직면하고 있는 경제위기의 직접적인 원인을
금융위기에서 찾기보다는 오히려 산업구조탓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그동안 경제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해온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한국의 대기업들도 비난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한국 대기업 구조가 어떤 식으로 변해야 할 것으로 보는지요.

"이같은 비난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대기업들이 지난 수십년간 경제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한국정부와 대기업들이 추구해온 경제개발정책에 일대 변화를
가할 시점이 온거죠.

이번 위기를 변화를 위한 더없는 기회로 봐야할 겁니다.

우선 어떤 경제개발을 추구할 것인가하는 목표부터 수정해야 합니다.

한국정부와 대기업들이 모색해온 노동집약적 산업경제시대는 막을
내렸습니다.

다가오는 21세기는 부가가치가 높은 이른바 "제3의 물결 경제"가 지배할
겁니다.

이를 위해 정부는 경제력분산과 중소기업육성에 힘을 쏟아야 할 겁니다.

대기업 입장에서는 현대경제사회연구원이 최근 보고서에서 지적한
것처럼 새로운 경영패러다임개발, 능동적인 구조조정에 박차를 가해야 할
것으로 봅니다.

다행인 것은 한국의 대기업들이 뛰어난 인재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는
겁니다.

대기업들은 이들 두뇌집단으로 하여금 제3의 물결시대에 필수적 요소인
정보와 첨단기술의 전략적 활용을 보장해 줘야 합니다.

기업정책과 관련, 또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대기업들의
은행소유는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일본의 예를 한번 더 들겠습니다.

대기업들의 은행소유가 가능한 일본의 경우 은행들이 금융기관 본연의
업무보다는 모기업의 자금창구역할에 치중해 왔습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은행경영의 효율화는 생각도 못할 일이죠.

개인적으로 은행은 경제활동을 위한 자금흐름의 "필터"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중요한 필터가 부실해서야 되겠습니까.

금융기관의 부실은 아시다시피 이번 동남아 금융위기와 직접적인
연관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점을 감안해 한국은 대기업의 은행소유를 보다 신중하게 처리해야
할 겁니다"

-정부와 기업들이 경제개혁과 구조조정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은 무엇입니까.

"속도입니다.

물론 현상황이 긴급을 요구하는 위기 상황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서둘러서는 안됩니다.

완급을 조절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사람이나 조직이나 갑작스런 변화에는 저항을 하게 마련이죠.

구소련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체제붕괴와 함께 엄청난 위기가 닥쳐왔을때 이에 대한 준비가 전혀
없었습니다.

예기치 못한 상황이어서 그렇겠지만 그 결과 몇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체제정비 등 펀더멘틀 구축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물론 구소련 붕괴와 한국은 직접 비교가 불가능합니다.

한국은 펀더멘틀을 모두 갖춘 상태이며 다만 이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을 일부 수정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보다 여유가 있다는 얘기죠.

그런만큼 변화를 추진하면서 완급조절에 신경을 써야 할 겁니다.

일례로 대량실업사태에 따른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선 충분한 준비과정과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으로 봅니다"

-현재 경제위기를 헤쳐 나가기 위해 기업들은 어떤 경영전략을 취해야
합니까.

"먼저 기업활동에 대한 개념부터 바꿔야 합니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기업이라면 눈에 보이는 뭔가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덕분에 기업들은 "만드는 것"에 관한한 많은 노하우와 기술을 축적해
왔으며 실제 많은 것을 만들어온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기업들은 앞으로 이들 만들어진 것에 대한 마케팅 등을 관리하는
서비스분야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 분야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IBM이 더이상 컴퓨터제조업체가 아니라 서비스업체인 것도 같은
이유에서겠지요.

인식변화와 함께 기업조직도 효율성을 최대한 살려 여기에 맞게 바꿔야
합니다.

단적인 예로 과거 "만드는 시대"에나 먹혀들었던 복잡한 명령체계도
단순화 시켜야 됩니다.

하부 조직에도 좀더 많은 권한과 결정권을 부여하는 것도 중요하죠.

"제3의 물결"시대에는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기 때문에 거기에
맞춰야 됩니다"

-일부 경제전문가들은 동남아금융위기는 오늘날 통합된 국제금융시스템이
과거 폐쇄적이던 시스템보다 위험하다는 것을 입증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는 미국이 지금껏 추구해온 시장개방정책과 정면 충돌하는 주장으로
보입니다.

"지난 1987년 미국 증시가 폭락했을 당시 뉴욕타임스지에 글로벌경제와
초대형 유조선을 비교한 글을 기고한 적이 있습니다.

유조선에는 방수구획실이라는게 있습니다.

방수구획실은 일종의 안전장치로 배에 구멍이 생길 경우 들어온 물을
특정방에 가둬두는 역할을 하기때문에 배의 침몰을 막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세계경제의 글로벌화로 유조선에 있던 방수구획실은 이를 대신할
안전장치가 마련되지 않은 채 제거됐습니다.

이에 따라 만약 사고로 배에 물이 차 온다면 이제 배는 침몰할 수 밖에
없게 돼 버렸습니다.

물론 국제적인 자본흐름을 막는 장애물이 전부 필요하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차단기 역할을 할 장치는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아시아금융위기가 미국 유럽등 여타 지역에도 적지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현실을 보고 있는 요즘엔 더욱 안전장치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아시아의 경제개발모델이 경쟁력 측면에서 미국에 훨씬
뒤졌다는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경제적인 관점에서보다는 오히려 문화적인 측면에서
접근해보는게 어떨까 합니다.

대부분 아시아 국가들은 다양성을 싫어합니다.

배타적인 면도 있습니다.

따라서 혈연중심적이지요.

이에 관해선 한국 일본 중국 등은 특히 심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양한 문화와 인종을 경제성장을 위한 최고의 무기로 활용하고
있죠.

개방적인 문화도 여기에 한몫을 했습니다.

최근들어 한국도 국제화의 기치아래 다양성의 필요성을 느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IMF가 각국의 경제 및 정치상황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천편일률적인
처방을 내린다는 비판이 경제전문가들 사이에 강하게 제기되고 있습니다.

IMF의 향후 구제금융패키지는 어떤 형태로 이뤄져야 바람직할 것으로
보는지요.

"이같은 주장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경우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이 두나라는 정치 문화 경제상황이 다릅니다.

이번 금융위기의 원인도 자연 다를 수 밖에 없겠죠.

그러나 양국에 주어진 시장개방 경제개혁 등 IMF의 처방전에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부분적인 차이는 있지만 전반적으론 대동소이합니다.

물론 IMF내 경제전문가들이 각국의 상황에 따라 적절한 조치를 내린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제3의 물결"에서도 지적했듯이 오늘날 세계경제는 산업시대의
대량생산체제를 거쳐 "소비자수요맞춤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이같은 시대변화에 따라 IMF도 "소비자"가 필요로 하는 "제품" 개발에
적극 나서야 할 것으로 봅니다"

< 정리 = 김수찬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8년 1월 2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