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저녁에 만나기로 돼 있는데 무슨 급한 용무가 있는가? 의아하다.
"만나서 말하기가 어려워서 그럽니다. 당신에게 골퍼 애인이 있다는데
그 말이 거짓이기를 바래요"
어느 때보다도 침착한 그의 말에 영신은 갑자기 솔직해지고 싶다.
"네. 사귀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러나 나는 아버지의 충고대로 당신을
선택하고 있는 거예요"
"사실대로 말해서 고마워요. 나의 친척중에 한 사람이 그런 정보를
주어서 그동안 고민했어요. 그리고 당신이 결혼 날짜를 자꾸 미루고 있는
것도 석연찮구요.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맙소. 그러면 아직도 그 친구와
사귀고 있는가요?"
그의 목소리는 어쩔 수 없이 떨려나오고 있었다.
조카딸인 여대생 백순애의 그 밉살스럽도록 심술궂은 얼굴이 떠오른다.
"아직도 나는 결론을 못 내리고 있어요. 나는 그를 떠날 수 있어도 그는
나를 결코 떠나려고 안 해요. 물론 백선생님 만나기 전부터의 관계니까 크게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은 없어요. 그러나 내가 이혼을 한 것은 그 골퍼
때문이고, 아버지는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있어요. 그래서 저는 백선생님이
정말 더할나위 없이 존경스럽고 좋으면서도 퍽 힘들어요"
"됐습니다. 빨리 결정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물론 나는 음악 다음으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사실 너무나 뜻밖의 정보였습니다. 금년을 넘기지 말고
결정해 주십시오"
그는 단호하게 말하고 전화를 끊는다.
그로서는 자존심이 무척 상했을 것이다.
그녀는 그것을 인정하고 또 이해한다.
이때 희색이 만면한 김치수가 회장실로 들어선다.
"점심식사 준비는 다 되어 있지? 오늘은 내가 너희들이 만난지 꼭 백일이
되는 날이어서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크게 한턱 쓰마. 그리고 꽃바구니
선물도 사왔다"
그래도 영신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걸 보자 김치수가 의아한 표정으로
묻는다.
내 전부를 주고도 못 바꿀 딸이 무엇 때문에 우울해 할까?
"미스터 백이 나와 지영웅 프로의 관계를 누구에게 들었나봐요"
"그래?"
그의 양미간에 굵은 주름이 잡힌다.
고통을 당하면 나타나는 찡그린 표정이다.
"누가 그 따위 입질을 했대?"
그는 자기의 권위를 짓밟은 자가 누구인가, 불같이 성이 났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2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