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기 위한 협상은 한마디로 미국의 주도
면밀한 작전에서 시작해서 미국의 완벽한 승리로 끝났다.

일부에서는 한국이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해야할 만큼 위기상황에 봉착한
것부터가 미국의 치밀한 음모라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는 정도다.

이런 주장은 어느정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막판에는 한국의 대통령 후보들까지 모두 끌려나와 항복문서나 다름 없는
구제금융 신청서에 서명해야 하는 외교적 굴욕까지 감내해야 했다.

국제외교 무대에서 예를 찾기 힘든 이런 수모의 뒤에는 강대국들의 세계
시장 지배전략이 얽혀 있고 미국과 일본의 동아시아 금융시장 장악을 위한
각축전이 깔려 있다는 게 관계자들의 분석이다.

이번 협상과정에 깊숙이 개입했던 한 고위관계자는 "분명 내놓고 말하기
힘든 복잡한 일들이 있었다고 봐야 하지 않겠나. 나중에 모든 것이 밝혀질
것"이라고 말해 IMF 구제금융 신청에 이르기까지 복잡한 과정들이 있었음을
시사했다.

미국의 근착 유에스앤드월드리포트지는 이와관련 "미국은 한국이 일본 등
역내국가들로부터 긴급 차입하려던 계획을 차단, 한국에 대한 영향력 행사를
위해 IMF의 구제금융을 신청하도록 유도했다"고 폭로해 주목을 끌고 있다.

임창열 부총리가 미쓰즈카 일본 대장상을 만나기 위해 직접 일본까지
날아가야 했던 과정도 미스테리를 남기고 있다.

임장관이 일본에서 미쓰즈카 대장상을 만난 시간은 불과 30분.

물론 일본의 자금지원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 공식적인 발표지만
불과 30분의 면담을 위해 일국의 부총리가 비행기를 타고 이웃나라까지
날아가게된 내밀한 속사정이 무엇이었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결국 우리나라는 자력으로 금융위기를 해결하는데 실패하고 지난 23일부터
심야까지 거듭되는 IMF실무단과의 협상에 들어갔다.

심야라고는 하지만 이역시 미국 시간에 맞춘 것이었다.

협상과정은 IMF실무단과의 협상이라기 보다는 커튼뒤에 얼굴을 숨기고 있는
미국과의 협상이었다.

특히 미재무성의 데이비드 립턴 차관이 극비리에 서울로 날아든 30일 밤
부터는 협상은 완전히 미국과 한국의 통상협상처럼 바뀌었다.

대기업 산업정책과 금융시장 추가개방이 협상의 도마에 올랐다.

사실 협상이라기 보다는 미국이 일반적으로 통보하고 한국은 받아들일수
밖에 없었다.

이때를 전후해 씨티뱅크등 미국의 금융계 인사들이 서울에 날아왔고 일본
정부 관계자들도 서울에 와있다는 풍문이 나돌았다.

그동안의 통상협상에서 우리가 결코 받아들이지 못했던 다양한 요구조건들이
쏟아졌다.

미국은 철저하리만큼 금융시장의 완전하고도 빠른 개방을 요구했다.

결국 주식투자한도 외국금융기관의 한국진출등 요구조건들은 모두 수용됐다.

일본은 우리나라의 수입선 다변화 정책을 폐지할 것등 그동안의 현안들을
끼워 팔았다.

국가경제가 부도를 내고 외국의 법정관리에 들어갔을 때 어떤 상황에
이르게 되는지를 명백히 보여준 협상아닌 협상이었다.

한국의 금융위기는 결국 우리나라의 통상전략도 완전히 무장해제당하는
최악의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 정규재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