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파일] '헤어디자이너 박준씨' .. '성실 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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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위 하나로 전국을 뒤흔든 사나이"
미용실 "박준미장" 대표인 헤어디자이너 박준(46)씨.
여성만의 영역으로 인식되던 미용업계에 도전,최고의 위치에 오른 인물이다.
최정상급 헤어디자이너로 전국에 그의 이름을 내건 헤어숍만 57개점.
미국 뉴욕과 영국 런던에도 프랜차이즈 미용실을 거느린 사업가다.
대학(숙명여대 경영대학원)에서 미용을 주제로 강의를 하는 "교수님"이기도
하다.
그는 자수성가의 대표적 인물로 꼽힌다.
전남 해남의 시골에서 태어나 배움의 혜택을 받지 못한 그는 "성공"을
위해 14세에 무작정 상경했다.
학벌도 기술도 없어 구두닦이, 아이스케키장수, 건설현장인부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미용사에 입문한 것은 21세때인 72년.
"친구들과 만나기로한 YMCA 빌딩에서 미용실을 본 순간 "그래 바로 이거야"
라는 생각이 번쩍 들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남자 미용사가 얼마 없어 사람들이 "남자가 오죽 할일이
없으면..." "안됐다"는 눈초리로 쳐다보기 일쑤였다.
"언니"들밖에 없던 미용업계에서 박원장은 특유의 성실함으로 어려움을
이겨내며 성공의 기반을 착실히 닦아갔다.
80년 미국에서 열린 국제미용대회에서 수상하면서 실력을 인정받았다.
서울 명동의 마샬,조희 미용실등에서 일하다 81년 드디어 자신의 미용실을
명동에 열게 됐다.
82년엔 모델을 거꾸로 매단채 머리를 자르는 업사이드다운 커팅을 시도,
세간의 주목을 끌기도 했다.
"힘들었던 과거가 있었기 때문에 희열도 컸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이 오히려 계속 일할수 있었던 원동력이 됐죠"
지금처럼 편할때 일을 시작했다면 이만큼 성공하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박원장은 일하는 것을 좋아한다.
편히 살수도 있지만 천성이 그런지 항상 바쁘다.
사장이지만 직접 머리를 자르고 손님을 상대한다.
95년 P&J라는 법인을 설립,현재 57개로 늘어난 체인점을 관리하고
프랜차이즈 사업을 위해 전국을 돌아다닌다.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국내 브랜드의 경쟁력을 갖추고 미용인
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시작한 일입니다"
외국 유명브랜드 미용실이 마구 들어와 비싼 로열티를 무는 꼴을 지켜볼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 목표는 1백개점.
"불경기에도 머리는 자란다"는 그의 말처럼 불황에도 사업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올해안에 2개점이 더 늘어날 예정.
그는 유난히 교육에 힘쓴다.
배움에 대한 열망이 남다른 것도 이유이지만 미용계에서 우수한 인력을
많이 배출해 세계로 진출시키겠다는 포부 때문이다.
한국인의 뛰어난 손재주를 수출하자는 것.
미용전문대학 설립이 그의 꿈이다.
"다시 태어나도 미용인이 되고 싶다"는 박원장.
"남성과 여성의 역할 구분이 무의미해지고 있는 요즘 남성이라 할지라도
여성의 영역에 과감히 도전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 양준영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2일자).
미용실 "박준미장" 대표인 헤어디자이너 박준(46)씨.
여성만의 영역으로 인식되던 미용업계에 도전,최고의 위치에 오른 인물이다.
최정상급 헤어디자이너로 전국에 그의 이름을 내건 헤어숍만 57개점.
미국 뉴욕과 영국 런던에도 프랜차이즈 미용실을 거느린 사업가다.
대학(숙명여대 경영대학원)에서 미용을 주제로 강의를 하는 "교수님"이기도
하다.
그는 자수성가의 대표적 인물로 꼽힌다.
전남 해남의 시골에서 태어나 배움의 혜택을 받지 못한 그는 "성공"을
위해 14세에 무작정 상경했다.
학벌도 기술도 없어 구두닦이, 아이스케키장수, 건설현장인부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미용사에 입문한 것은 21세때인 72년.
"친구들과 만나기로한 YMCA 빌딩에서 미용실을 본 순간 "그래 바로 이거야"
라는 생각이 번쩍 들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남자 미용사가 얼마 없어 사람들이 "남자가 오죽 할일이
없으면..." "안됐다"는 눈초리로 쳐다보기 일쑤였다.
"언니"들밖에 없던 미용업계에서 박원장은 특유의 성실함으로 어려움을
이겨내며 성공의 기반을 착실히 닦아갔다.
80년 미국에서 열린 국제미용대회에서 수상하면서 실력을 인정받았다.
서울 명동의 마샬,조희 미용실등에서 일하다 81년 드디어 자신의 미용실을
명동에 열게 됐다.
82년엔 모델을 거꾸로 매단채 머리를 자르는 업사이드다운 커팅을 시도,
세간의 주목을 끌기도 했다.
"힘들었던 과거가 있었기 때문에 희열도 컸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이 오히려 계속 일할수 있었던 원동력이 됐죠"
지금처럼 편할때 일을 시작했다면 이만큼 성공하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박원장은 일하는 것을 좋아한다.
편히 살수도 있지만 천성이 그런지 항상 바쁘다.
사장이지만 직접 머리를 자르고 손님을 상대한다.
95년 P&J라는 법인을 설립,현재 57개로 늘어난 체인점을 관리하고
프랜차이즈 사업을 위해 전국을 돌아다닌다.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국내 브랜드의 경쟁력을 갖추고 미용인
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시작한 일입니다"
외국 유명브랜드 미용실이 마구 들어와 비싼 로열티를 무는 꼴을 지켜볼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 목표는 1백개점.
"불경기에도 머리는 자란다"는 그의 말처럼 불황에도 사업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올해안에 2개점이 더 늘어날 예정.
그는 유난히 교육에 힘쓴다.
배움에 대한 열망이 남다른 것도 이유이지만 미용계에서 우수한 인력을
많이 배출해 세계로 진출시키겠다는 포부 때문이다.
한국인의 뛰어난 손재주를 수출하자는 것.
미용전문대학 설립이 그의 꿈이다.
"다시 태어나도 미용인이 되고 싶다"는 박원장.
"남성과 여성의 역할 구분이 무의미해지고 있는 요즘 남성이라 할지라도
여성의 영역에 과감히 도전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 양준영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