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축국치.

경제주권 상실에 4천만 국민의 자존심이 여지없이 구겨졌다.

국민들은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한 것이 나라를 통째로
일본에 빼앗겼던 경술국치에 버금가는 것으로 여기는 듯 하다.

한때는 개발도상국의 부러움을 사며 외국언론의 표지를 장식하고 선진국
사교클럽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까지 가입했으나 이제는 국제금융위기
의 진원지로 온세계의 불안한 눈길을 받는 딱한 신세가 됐다.

멕시코 금융위기를 빗댄 "데킬라효과"라는 말대신 "아리랑효과"라는 말이
국제금융시장의 통용어가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되돌아보면 이런 국치는 얼마든지 피할수도 있었다.

경영자들의 변하지 않는 차입금의존.팽창경영의식과 경직된 고용.임금관행,
그리고 관료의 복지부동과 대통령을 포함한 정치권의 경제경시풍조가
없었다면 말이다.

이제와서 지나간 일의 잘잘못을 따진다고 해서 득될 것은 없다.

IMF의 신탁통치가 기정사실인 상황에서 융자규모와 조건을 우리경제가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이행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다.

국제자본이 이웃집 넘나들듯이 자유롭게 움직이는 시대변화에 맞게 경제
운영의 기본틀(패러다임)을 새롭게 만들어야 하는 것도 시급한 일이다.

지원과 보호에 익숙한 "온실체질"로는 칼날처럼 날카로운 IMF 조건을
맞추기 힘들다.

노동계와 재계가 정부가 아닌 IMF와 "항전"을 벌일 경우 "2류국가"로
떨어질 가능성이 높은 실정이다.

꼭 1백년전 우리 선조들은 세계의 변화를 능동적으로 따라잡지 못해
나라마저 빼앗기는 슬픈 역사를 남겨 놓았다.

엎질러진 물이라고 자포자기하지 말고 가능한한 빨리 신탁통치에서 벗어나기
위해 할수 있는 모든 일을 해야할 때다.

홍찬선 < 증권부 >

(한국경제신문 1997년 11월 2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