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21년(1643) 계미에 처음 간행된 "한산이씨세보" 권1에 등재된 이개의
항목은 "육신전"의 내용중 이개 부분을 초록해서 기록해 놓았을 뿐 그의
출생 연월일도 기록되어 있지 않고 그 부인은 물론 부모의 생졸 연월일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그에게는 네명의 누이가 있어서 그들이 승지 이휘(?~1456)와 부사
이분연, 집현전 수찬 허조(?~1456), 사정 이엄에게 출가한 사실만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개의 부친인 이계주는 이개가 어렸을 때 이미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던듯 하다.

이개가 22세 때인 세종 20년(1438)에 그 조부인 한산부원군 양경공 이종선
(1368~1438)이 71세로 서거하는데 아마 이계주가 돌아간 것은 그보다 훨씬
전이었던 것 같다.

이종선의 산소는 고향인 한산 기린봉 아래에 있는 그의 부친 목은 이색의
묘소 바로 아래에 있는데 이계주의 산소 역시 그 부근인 영모암 남쪽 기슭에
있기 때문이다.

목은 보다 앞서간 이종선의 두 형이나 그 후손들이 오히려 장손 계열
이면서도 고향의 선산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개성이나 서울 부근에 새로운
묘소를 마련하고 있는데 막내의 장자인 이계주만 한산 선영에 안장되었다는
것은 이종선이 일문의 종장으로 있는 상황에서만 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사실을 분명히 해주는 기록이 박팽년의 문집인 "박선생유고"에
남겨져 있다.

이개가 세종 26년(1444) 봄에 세종대왕을 호종하여 청주 초수리에 내려
왔다가 청명일을 맞아 부친의 묘소가 있는 선영을 성묘하기 위해 왕은을
입고 고향으로 떠날 때 함께 내려와 있던 박팽년 등 집현전 학사들이
송별시를 지어 축하하는데 그 서문을 박팽년이 지었던 것이다.

"청보가 한산으로 가는 것을 보내는 시의 머릿글(송청보지한산시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상감께서 청주에 머무르심에 우리들 여섯 사람도 쫓아 내려왔는데, 청보는
그 선친의 산소가 한산에 있어서 산소를 찾아가 뵙고자 하니 상감께서 역말
을 주어 달려가게 하고 또 본군으로 하여금 제수를 마련하여 예를 닦게
하였다.

아 그 영광스러움이여!

청보는 일찍이 부친을 여의어 선영을 찾고자 하는 마음이 날마다 깊어져서
궁중에 있으면서도 남쪽을 바라보며 슬퍼하였고 매양 우리들과 더불어 얘기
하다가 반드시 이를 언급하였으며 또 요즘에는 산소가 침해당할 우려가
있다 하여 가고자 했으나 이루지 못한지가 오래였다.

이제 여기에 어가를 호종하여 남쪽으로 왔는데 시절이 마침 청명에
다다르니 더욱 바라는 마음이 있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의 내려옴이 날마다 동궁을 뫼시어 경전을 끼고 토론하며 운학
을 찬정(착정)하는 것이니 그 맡게된 바가 무겁고 컸다.

그런데도 상감께서는 특별히 총애하는 영광을 내리시었다.

대낮에 비단옷 입고 가는 화려한 모습이 봄바람에 영예롭게 비추어 금강을
건너 용산을 지나 기린봉에 이르게 되면 마을마다 그를 위해 뛰쳐나와 구경
하고 산천마다 그를 위해 빛을 더할 터이니 죽은 사람이 알수 있다면 응당
저승에서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리라.

자네의 전날 슬퍼하던 마음이 이에 이르러서 위로받을 수 있겠구나.

무릇 사람의 자식이 되어 누구인들 부모를 그리워하여 탄식하지 않겠는가만,
옛사람이 이르기를 충신은 효자가문에서 얻는다 하니 자네의 양친에 대한
효가 이와 같으니 그 나라에 충성스러움도 가히 알수 있겠구나.

상감의 총애와 돌보심이 어찌 여기에 그치기만 하겠는가.

하물며 자네 집안은 문효공(가정 이곡)이 앞에서 가업을 터닦고, 문정공
(목은 이색)이 뒤에서 아름다움을 이어 다져서, 문장과 도덕으로 한 나라의
으뜸이 되었음에랴!

덕을 쌓아 흘러온 빛이 자네에게 이르렀으니 효를 옮겨 충으로 삼는 것은
이 때가 그 때일세.

자네는 그것을 힘쓰도록 하게.

그 떠남에 비해당이 가장 먼저 시를 지어 바치자 시종한 여러 사람들이
따라서 그에 화답하니 인수가 드디어 서문을 지어 말하다"

이 글이 언제 지어진 것인지를 밝히고 있지 않지만 글의 내용중에서 청명이
끼여 있는 봄에 청주로 어가를 호종하여 왔다거나 이개와 박팽년 등이 운학
을 찬정하고 있었다는 말이 있어 이것이 세종 26년(1444) 3월초에 지어진
글인 것을 추정할 수 있다.

지난해인 세종 25년(1443) 12월에 훈민정음을 제정 반포하고 이개와 박팽년
이 함께 28세가 되는 이 해 2월 16일에 세종대왕은 집현전 교리 최항,
부교리 박팽년, 부수찬 신숙주 이선로 이개, 돈녕도정 강희안 등에게 명하여
남송의 황공소가 편찬하고 원나라 웅충이 주석을 낸 "고금운회거요(보통
<운회>로 약칭된다)" 30권을 언문, 즉 훈민정음으로 번역해 내게 하고 동궁
(문종)과 진양(수양으로 개칭)대군 및 안평대군이 이를 감장하게 하는데,
이 일이 진행되는 중에 세종이 눈병을 치료하기 위해 청주 초수리로 초수
목욕요양을 떠나면서 동궁을 비롯하여 진양대군과 안평대군 및 이 일에
참여하는 집현전 학사들을 호종시켜 함께 데리고 내려간다.

2월 28일 무신에 서울을 출발하여 3월 2일 임자에 초수리에 당도하였으니
박팽년이 서문에서 이개가 청명일을 당하여 한산 선영으로 성묘하러 떠나게
되었다 하였고 운학을 찬정하고 있다 하였던 것이다.

그러니 이 글은 세종 26년 3월 초순 청명일에 지어진 것이 틀림없다
하겠다.

이때 성삼문의 조부인 판중추원사 성달생(1376~1444)도 69세의 노구를
이끌고 호종하여 왔다가 4월 10일 이곳에서 갑자기 돌아가는데 성삼문도
이 일행에 끼여 있었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어떻든 이로써 이개의 부친인 이계주가 이보다 훨씬 이전인 이개의 어린
시절에 돌아갔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개의 모친도 장수하지 못하고
일찍 돌아갔던 듯 하니 이개가 멸문의 화를 당할 때 그 모친이 노비로
분배되는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이개의 모친은 고성군수를 지낸 삼척 진씨 진명례의 따님으로 조선 개국
공신 진충귀의 손녀였다.

그리고 이개의 첫째 매부 이휘(?~1456)는 고려 충렬왕이래 명문으로 부상
하여 대대로 재상의 지위를 잃지 않던 양성 이씨 후예로 지중추원사 이사검
의 독자였는데 일찍이 세종 17년(1435)에 문과에 급제하여 처남인 이개가
단종 복위를 도모하던 세조 원년(1456) 6월 1일에는 공조참의의 자리에
있으면서 이 거사에 동참하지만 6월 2일 김질의 고변이 있자 구명도생하려는
구차스런 생각으로 정원에 나와 다시 고변하면서 이미 6월 1일 아침에
신숙주에게 그 음모를 고발하였었다고 변명하지만 모면하지 못하고 6월 8일
이개 성삼문 등과 함께 거열된다.

이개의 셋째 매부 허조(?~1456)는 하양 허씨로 세종대의 명재상인 문경공
경암 허조(1369~1439)의 손자이자 김종서와 안평대군 등이 피살된 뒤에 당시
이조판서로 있으면서 이들의 무죄를 주장하다가 수양대군 일파에게 거제도로
유배된 다음 목졸려 죽은 허후(?~1453)의 조카였다.

세종 29년(1447)에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부수찬이 되어 있었는데 처남인
이개와 뜻을 같이하여 상왕을 복위하려다 일이 그릇되자 6월 6일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하고 말았다.

이때 연령 구령 등 두 아들도 함께 자결하고 그 부인인 이개의 셋째 누이
안비와 그의 딸 의덕및 이개의 첫째 누이 이휘의 아내 열비는 이개의 셋째
숙부로 수양의 측근이 되어 있던 이계전에게 노비로 분배된다.

이계전을 심리적으로 압박하려는 수양 일파의 계략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사실 이계전은 이개가 상왕 복위거사의 주동인물로 밝혀지며 가장 극렬하게
저항하자 입장이 무척 난처하게 되었었다.

다행히 이개가 사실대로 말하여 이미 의절한 상태로 거사 사실을 전혀
알리지 않았다고 밝혔기 때문에 6월 14일 세조의 특명으로 3촌 숙질간의
연좌죄를 모면하기는 하였지만 이미 막내아우인 이계정은 흥덕의 관노로
귀양가 있는 형편이었으니 그 형편이 얼마나 불안하였었겠는가.

드디어 6월 28일에 흥덕의 관노가 되어 있던 이계정이 관노에서 풀려나
본현에 안치는 되었지만 7월 1일에는 사간원에서 이계전에게 연좌죄를
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7월 12일에는 이계전의 아내까지 연좌죄를 면하게
해서는 안된다고 사헌부에서 들고 일어났다.

이런 형편에서 세조가 7월 7일 의금부에 전지하여 난신에 연좌원 부녀자들
을 대신들에게 나눠주게 하면서 이런 처분을 내렸으니 이계전이 얼마나
바늘방석에 앉은 듯 하였겠는가.

이개의 아내 전주 이씨는 예조판서 개국공신 완성군 이백유의 손녀로
판군기사 이속의 따님이었는데 우참찬 강맹경(1410~61)에게 노비로 주게
된다.

이때 목은의 장자인 이종덕의 손자중에서도 이 복위거사에 6촌형인 이개와
뜻을 같이하여 동참한 이가 있었으니 종덕의 제 4남인 판중추원사 맹진의
차자인 도진무 이유기(?~1456)였다.

그는 박팽년의 아우인 박대년과 성삼문의 아우들인 성삼성 성삼고 등과
함께 6월 21일에 거열로 능지처참되어 3일동안 저자에 효수되는데 세조의
특명으로 그 부친인 이맹진은 연좌죄를 면하게 된다.

아마 목은의 손자라서 민심을 고려하여 특별 배려한 까닭이었을 듯 하다.

그러나 이유기의 아내와 딸들은 물론 누이까지도 모두 노비안에 들어
대신들에게 나누어진다.

그중에 형조참의 황효원(1414~81)에게 내려진 이유기의 둘째 따님은
황효원의 후실이 되어 2남2녀를 두고 만년에 대복을 누리게 된다.

정창손에게 분배된 이유기의 아내와 세 따님들도 뒷날 모두 풀려났던 듯
그 세 따님들은 모두 벼슬한 사대부의 부인이 되어 후손을 남기고 있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0월 1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