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 깨버리는 거예요 아줌마. 나 좀 봐유. 배운게 있나 돈이 있나,내가
얼마나 울었는지 아요? 돈 있겠다 시간 있겠다, 인생은 짧아유. 그냥 저냥
사는 거유"

그러자 전같으면 상대도 안 했을 녀석하고 공박사가 농담을 한다.

그녀도 약간 취했다.

차돌같은 공인수도 오늘 왠지 마음에 쌓인 독소를 씻어버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이 아이가 말하는 쉽게 사는 방법이 우리를 구해줄 수도 있겠구나 십다.

의학적이다 철학적이다 그게 무슨 개소리냐? 그래서 너는 정말 행복했니?

차라리 언젠가 추파를 던지던 제약회사 영업부직원 박광석과 교제했으면
인생이 얼마나 더 풍요로웠을까?

남의 남편 붙들고 무슨 좋은 꼴 보자고 7년간이나 그것도 일년에 한두번
만나면서 보냈는가.

그동안 좋은 나이가 다 저물어갔다.

"이봐 총각. 이 아줌마에게 필요한 남자는 에이즈에 걸리지 않은
순결하고 피가 깨끗한 남자야"

공박사도 허파에 바람을 잔뜩 넣고 우스갯소리 속에 진실을 섞어서
말한다.

울어서 검은 마스카라 흔적이 얼룩진 강은자는 아주 희극배우같은
꼴이다.

"아줌마, 그게 제일 어려운 질문이군요.

나는 그저께도 에이즈 테스트를 했어요"

"언제 결과가 나오는데?"

"며칠 걸려요. 하지만 다른 친구를 증명할 수는 없어요"

그 녀석은 은근히 중요한 정보를 흘리면서 강은자에게 프로포즈를
그럴듯하게 한다.

많이 배운 것은 없어도 머리는 좋은 아이인가 보다.

"됐어. 그러면 그 결과를 이 친구에게 연락해라. 그러면 아줌마가 너를
신용하고 애인이 될 수도 있으니까"

"맞지요? 아줌마는 바람난 유부녀가 아니구 싱글이지요?"

"그래. 너희들과 똑같은 싱글이다"

공인수 박사는 이 술집 웨이터와 이야기를 하는 동안 무엇인가 기분이
상쾌해진다.

아무 생각없이 지껄이면서 친구를 위해 자기가 해결사로 나서는 이런
쓰잘 것 없는 짓거리가 자기의 스트레스를 씻어주기도 하는구나.

옹골차게 농담을 모르고 살아온 공박사도 이런 머리 휴식은 정신의학상
좋은 것이라는 새로운 경험을 한다.

그러면서 섹스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가 아닐까?

50이 가까워진 나이는 진실로 그녀를 우울하게 하고 지난 7년간이
너무도 아깝고 억울하다.

그녀는 동에서 뺨맞고 서에서 화풀이한다는 속담을 자늑자늑 씹는다.

"총각, 나에게도 에이즈검사 결과를 알려줄 수 있는 친구 없을까?"

"시골서 온 새로운 애가 있어유. 농사 일하기 싫어서 왔는데 저기 있는
저 시커먼 녀석 있지요? 마음에 든다면 내가 검사증 갖고 만나라고 할 수
있어요"

(한국경제신문 1997년 10월 1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