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특별사면될 경우 두 사람에게 부과된
4천2백여억원의 추징금문제는 어떻게 될까.

대통령이 사면을 할 때 추징금도 면제한다고 명시하지 않는 이상 추징금
선고효력은 지속된다는 해석이지만,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확인된 노씨의 금융자산 1천9백억원만해도 그렇다.

대통령재임중 타인명의를 빌린 차명계좌가 거의 전부라는 얘기이고 보면
이를 실명전환절차를 밟아 인출하도록 할 경우 실명제실시 이후 매1년마다
10%씩 부과하게 돼있는 과징금문제가 불거지게 된다.

그렇다고 검찰수사결과 차명인게 드러난 계좌를 그대로 인출토록 허용하는
것도 해당은행입장에서는 껄끄롭기만 하다.

실질적인 실명제 위반인게 너무도 분명하니까.

일본판 실명제라고 할 그린카드도입논의가 한창일 때 금융관계자들의
반대론은 이런 것이었다.

"은행원이 예금주를 고개숙여 인사하면서 맞아야 하는 여건에서는 그린
카드제는 너무 힘겹다"는 주장이었다.

도무지 우리 기준으로는 궁색하기 짝이 없는 주장이었지만 그것이 먹혀
들어가는 얘기로 통했기 때문에 더욱 놀랍기만 했었다.

국회는 지금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안"과 "자금세탁방지에
관한 법률안"의 심의를 진행중이다.

4년만에 금융실명제에 대한 성형수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정부에서 낸 두 법안내용이 이미 알려진 뒤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대선
정국과 기아사태 등 뜨거운 이슈가 산재해있는 까닭인지, 그 원인은 따져
봐야 겠지만 두 법심의에 대한 일반의 관심은 수준이하인 것 같다.

지난주에 있었던 공청회를 거의 다루지 않은 신문들조차 적지 않다는 점만
봐도 그렇다.

마치 정의사회가 열리는 순간이기라도 한양 뜨겁기만 했던 실명제긴급조치
발표 당시의 분위기와는 너무도 대조적이다.

긴급조치에는 관여하지 않았지만 장영자 사건직후 금융실명제를 들고
나왔던 "실명제의 산파" 강경식 부총리가 긴급조치의 내용을 완화하자는
두 법의 주창자라는 점도 따지고 보면 아이러니다.

긴급조치가 취해진후 가장 먼저 눈에 띈 변화중의 하나는 길거리에서
사채꾼명함을 나눠주던 여인이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이들 여인들이 다시 등장하는데 걸린 기간은 아마도 6개월을 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어쩌면 실명제의 현실적 한계였다고도 볼 수 있다.

대손투성이 기업대출보다 훨씬 쏠쏠한 가계대출에 눈길을 돌린 은행들이
늘어난 탓으로 일반가계가 은행돈을 빌리기가 몇년전보다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쉬워졌지만, 그래도 사금융시장은 여전히 성업중이다.

몇년새 폭발적으로 늘어난 신용카드가 소액 사채거래를 매개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는건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최근들어서는 신용카드와 금괴매매를 이용한 신종 사채거래도 등장했다는
얘기다.

신용카드로 금괴를 사고 이를 즉석에서 되파는 형태다.

금리도 종래의 신용카드사채대출보다 싸고 빌릴 수 있는 금액도 커지기
때문에 이래저래 이용자가 늘고 있다는 얘기다.

약삭빠른 사금융업자들의 영역은 이런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지난 4월1일부터 제도적으로 허용된 적대적인 기업인수합병(M&A)도 이들을
즐겁게 하는 무대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다.

출처불명의 자금들이 M&A시장을 횡행하고 있다는 것은 공지의 사실이다.

무역 가구 제약 등 다양한 업종의 부채비율이 낮은 중견급 업체들이
이들이 노리는 먹이다.

실제로 기업을 인수.합병하겠다는 의도라기 보다는 주식을 대량매집,
경영권을 위협해 비싸게 되팔려는 이른바 그린메일이 목적일 것으로 점쳐
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당해 회사에서 불평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외국바이어를 만나는 등 본연의 업무에 전력투구해도 버티기 어려운 상황
인데 경영권방어에 매달릴 수밖에 없도록 했다고 M&A허용을 성토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그러나 과거와 같은 관제 부실기업정리를 더이상 되풀이하기 어려운
상황이고 보면 시장기능에 따른 진입과 퇴출이 가능하도록 M&A를 허용하는
것은 불가피하고, 이들 M&A세력이 그나마 주가를 받치고 있다고 보면 그
역할이 꼭 부정적이라 보기도 어렵다.

어쨌든 실명제이후에도 사금융업자 등의 영역은 줄어들지 않았다.

그렇다고해서 실명제의 그물이 너무 성글었다고 비난하려는 의도는 절대로
아니다.

노태우씨의 비자금이 드러나는데 일조를 했다는 것만으로도 실명제는
그것으로 좋다고 본다.

실명제의 그물이 너무 촘촘해 저축이 늘지 않고 과소비가 극대화됐다는
주장도 난센스다.

한보사건으로 드러난 정치인들의 "떡고물"규모가 상상이상이었고 보면,
그들이 불편을 느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현재의 불황 등 경제적 어려움이 실명제에 원인이 있다는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

실명제는 어차피 관념적인 제도다.

노씨처럼 큰 고기가 걸리면 그것으로 좋고 작은 고기가 빠져나가도 어쩔
수 없는 제도.

다분히 선언문적인 일면이 있게 마련이다.

그 비용은 이미 치른만큼 치렀다고 볼 수 있다.

굳이 왜 실명제를 보완해야 하는지, 그래서 얻을게 무엇인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정말 시급히 다루어야 할 숫한 과제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더욱 그런
생각을 갖는다.

능력에 부치는 일은 우선 접어두고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인 일로
무료함을 달래고 있다면 세금이 아깝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9월 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