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깊이 아끼는 원로 한분이 서울에 들어와 몇달동안 살면서 느낀
소감을 말하던중 언론의 보도자세에 관한 따끔한 비판이 있어 소개한다.

"TV방송은 그 내용의 열의 아홉은 먹고 노는 이야기이고 나머지 1할이
나라와 사회에 대한 정보를 전하는 내용인데, 그 내용의 열의 아홉은 남을
헐뜯고 약점을 들춰 내고 나무라고 야단치는 이야기이다.

사정이 이런데 국민들이 나라와 민족 사회를 아끼는 마음이 생기겠는가.

특히 이번 괌에서 일어났던 항공기 추락사고의 보도를 보면서 놀랐다.

보도 내용은 누구를 위한, 그리고 무엇을 위한 보도인지 알수 없었다.

큰 사고가 났을 때 이웃과 나라가 필요한 것이 아닌가"

곰곰이 새겨 보면 무서운 이야기이다.

지난8월6일 괌에서 대한항공 801편이 추락하였다.

2백명이 넘는 사람들이 순간적으로 목숨을 잃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큰 사건인 만큼 언론이 흥분하여 크게, 그리고 상세하게 보도하려는 것은
이해할 만하고 특종 경쟁을 하는 언론사들의 생리를 생각한다면 어느 정도의
과장과 오보는 앙해해 줄만하다.

그러나 어떤 사건의 보도도 목적과 지침이 있게 마련이다.

죽은 사람들의 명예가 걸려 있고, 유족의 가슴 아픈 감정이 관련되고,
또한 항공사의 명예와 국가의 이익이 깊이 연계되어 있는 사건인 만큼
무엇을 어떻게 보도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이 보이지 않아 씁쓸했다.

미국 언론들은 시종일관 사고의 책임을 조종사와 항공사에 돌리는
방향으로 몰고 갔다.

10여년 전의 사고까지 모두 연계시켜 조종사의 과실로 믿어지도록
유도했다.

두말할 것도 없이 미국의 국익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항공기가 공항에 착륙하는 과정에서 사고가 났을 경우 생각해 볼수 있는
사고 원인은 급격한 기상 악화 등 불가항력적인 원인이 있을 수 있고,
조종사의 과실이나 기체고장도 생각해 볼수 있다.

그리고 공항의 관제시설 불비와 관제사의 잘못을 생각해 볼수 있다.

이 중에서 어느 것이 결정적 원인인지를 밝혀 내는 일은 쉽지 않을
뿐더러 전문가들이 반년 또는 그 이상 분석해야 겨우 윤곽이 드러나는게
보통이다.

그런데 사고 다음날부터 죽어서 말을 못하는 "조종사의 실수"라고 보도하는
것은 분명 의도적인 것이라고 밖에 할수 없다.

문제는 미국 언론이 그렇게 보도한다고 생각 없이 부화뇌동하는 한국
언론의 보도 태도다.

비행정보자료기록장치(블랙박스)의 내용이 아직 판독되지 않은 상태에서,
더구나 괌 공항의 관제 장치가 엉망이었음이 밝혀진 마당에 말 없는
조종사에게 잘못을 뒤집어 씌어도 좋은가.

평생을 조종사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오다 남의 잘못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명예를 그처럼 쉽게 훼손해도 되는가.

그분들은 하늘에서 얼마나 억울해 하겠는가.

오늘날처럼 온 세계가 치열한 전쟁을 하는 경제전쟁시대에 한국을 대표하는
항공사에 대한 믿음을 깨는 일을 우리 언론이 앞장서서 한다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일이 아닐수 없다.

우리 정부도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섰어야 했다.

해외에서 많은 국민들이 난을 당했다면 당연히 정부가 나서서 구호와
수습을 하는데 앞장서야 하지 않겠는가.

미국 정부에 양해를 구하고 공군 수송기로 외부 요원을 실어 파견했어야
했다.

그리고 한국인 조종사와 한국 항공사의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필요한
정부차원의 조치를 했어야 했다.

사건은 지나간 일이나 뒷 수습은 지금부터다.

정부와 언론, 그리고 이 문제를 잘 아는 학자들 모두가 힘을 모아 미국에
밀려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온 사회가 함께 나서서 일을 처리하는 모습을
나라 안팎에 보여 주어야 국민들에게는 대한민국에 대한 자긍심을 심어주고,
그리고 국제사회에는 한국의 "만만치 않음"을 일깨워주게 될 것이다.

첫째로 정부가 앞장서서 사고 수습을 깨끗하게 마무리 지어야 한다.

이미 죽은 사람을 살려낼 수야 없겠지만 그들의 명예를 지켜주는 일과
유가족의 아픔을 덜어주는 일에 자상한 어머님의 손길 같은 배려를 세심하게
베풀어 주어야 한다.

둘째로 이번 사건은 미국이라는 외국이 관련된 사건인 만큼 나라가 나서서
절대로 우리측이 억울함을 당하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펴야 한다.

국민은 해외에서 나라밖에 믿을 것이 있는가.

"내 뒤에는 대한민국이 있다"고 국민들이 믿도록 해 주어야 한다.

셋째로 언론이나 국민들은 말 한마디 전하는데 있어서도 앞뒤를 가리는
신중함을 보여야 한다.

생각 없이 옮긴 말 한마디로 인해 여러 사람의 명예가 손상당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넷째로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라고 할지 모르나 대형 참사에 대비할수
있는 태세를 이번 기회에 마련해 두어야 한다.

우리는 그동안 수많은 참사를 겪었다.

그때마다 준비가 없어 허둥대곤 했다.

이번에는 두번 다시 이런 일이 없도록 조난 대책을 마련해 두자.

너무나 가슴 아픈 큰 참사를 지켜 보면서 느껴지는 일이 많아 몇자
적었다.

삼가 희생자의 명복을 비는 마음과 함께.

(한국경제신문 1997년 8월 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