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매우 잘 사는 친구를 찾아간 일이 있다.

그는 1천여평이나 되는 대지에 수영장과 정구장을 갖춘 저택에 살고
있으며, 네식구에 고급승용차 3대를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부유층도 누릴 수 없는 풍요롭고 쾌적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친구의 재산이 모두 얼마인지를 따져보았다.

실제로 그는 나이가 들면서 마땅한 자리만 있으면 그곳을 정리하고 귀국해
볼까 하는 생각도 하고 있던 터였다.

그의 집은 백만달러 짜리인데 우리 돈으로 치면 9억원이다.

그러나 선진국에서는 우리나라처럼 현찰을 주고 집을 사지 않는다.

20% 정도만 돈을 내면 나머지는 은행에서 20년 이상의 장기 대부를 해준다.

그러고보니 그 집은 팔아봐야 2억원도 채 되지 않는다.

나머지 재산을 모두 정리하고 은행예금 등을 모아도 그의 총재산은 5억원도
되지 않았다.

이걸 가지고 한국에 와봐야 집한채 사고 나면 그만이다.

그 정도의 개인재산을 가지고 그렇게 잘 살 수 있다는 것은 우리와 같은
사회에서는 상상도 되지 않는 일이다.

이처럼 선진사회는 개인재산이 없어도 매달 받는 월급만 많으면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는 사회이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개개인은 선진국사람들보다도 부유하다.

아파트 한채값이 수 억원에 이르고 웬만큼 잘 사는 사람들의 재산은 수십
억원에 이른다.

우리는 소득중심의 사회가 아니라 재산중심의 사회, 다시 말해서 재산이
많아야 잘 살 수 있는 사회이다.

그런데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삶의 질은 선진국에 비해 매우
낮다.

그 차이가 무엇인가.

왜 선진국에서는 개개인이 가난하면서도 잘 살고, 왜 우리나라에서는
개개인이 부유하면서도 못사는 것인가.

그 근본원인은 선진국 사람들은 주로 사회재산을 축적하는데 비해 우리는
주로 개인재산을 축적한다는데 있다.

이 말의 뜻을 좀더 부연해 보기로 하자.

후진 단계에서는 생활수준이 먹는 것과 입는 것으로 판가름되지만 선진
단계에 들어서면 교통 환경 도서관 양로원 주택 의료 교육 휴식공간 등과
같은 이른바 생활공공재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런데 이러한 공공재는 개개인이 혼자 생산할 수도 없고 소비도 할 수
없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공동으로 생산해서 공동으로 소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공공재라고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맑은 물을 마시려면 상수원을 함께 보호관리하고, 함께 수돗물을
생산해서 공동으로 소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공공재 투자는 사회저축으로 이루어진다.

선진국에서는 개개인의 여유자금은 세금, 각종 사회보장 부담금, 유산의
사회환원, 사회사업에 대한 기부와 봉사 등 사회저축 형태로 축적된다.

그리고 사회는 이 자금을 가지고 교육투자나 환경투자 등 생활공공재를
생산 공급하고 개개인들은 무료로 이러한 공공재를 소비한다.

그래서 개개인들은 개인재산이 없어도 좋은 자녀교육과 원활한 교통,
그리고 쾌적한 환경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개개인의 재산축적에는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 있지만 사회적인
축적에는 무관심하고 이를 기피하는 경향마저 있다.

그리하여 개개인으로서는 해결할 수 없는 사회공공재를 개인저축으로
각자가 해결하려 하는 것이다.

교육세를 더 써서 학교 시설을 확충하는 일을 기피하고 그 대신 엄청난
사교육비를 들여 내자식만 잘 교육시키려 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 좋은 교육을 시킬 수 있겠는가.

상수원을 잘 보호 관리하여 수원을 깨끗하게 지키는 노력은 소홀히 하면서
개개인이 수도꼭지에 값비싼 정수기를 달아서 맑은 물을 얻으려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맑은 물을 마실 수 있겠는가.

이러한 후진적인 생활관은 우리나라의 집단이기주의에서 나온 것이다.

사회전체의 이익과 관계없이 나와 내 가족의 이익을 실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집단이기주의는 사회전체의 이익과 일치하는 개인이익을 추구하는
보편적 개인주의와 상충된다.

한국인은 지금 나혼자만 잘 살 수 있고 또 나의 가족만 잘 살면 된다는
사고가 보편화되어 있다.

이러한 생각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문제였던 시대에는 적응력이 있었다.

이제 우리나라는 삶의 질을 추구하는 선진화 단계에 와있으며,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데 있어서의 최대 걸림돌은 생활공공재의 절대 부족이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는 경제가 성장하여 고소득국이 되더라도 물가는
비싸고 생활수준은 낮은 이른바 고물가-저생활국이 될 위험이 큰 것이다.

이제 우리는 "더불어 살아가는"문화를 창조해야 한다.

개인재산 축적에만 급급하지 말고 사회재산을 축적하는데 합심해야 한다.

그것이 선진국으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점을 우리 모두 유의해야 할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8월 2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