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팽년 일가는 박중림과 그 네아들들인 박팽년 박인년 박기년 박대년 등
5부자가 모두 집현전 학사 출신이니 시문으로 당대를 휩쓸었던 집안이었다.

따라서 저술한 시문과 가장의 문적이 책광을 채우고도 남았을 터인데
멸문의 화를 당하면서 이것들이 철저하게 인멸되어 겨우 박팽년의 유고
약간이 "육선생유고"중의 한권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그러니 박팽년 부자나 선대의 행장이 제대로 전해질 리 없고 내외가도
모두 연좌되어 가문을 보존하지 못하였으므로 그 가승이나 족보가 온전하게
꾸며질 수 없어 숙종17년(1691) 신미에 박팽년이 복관된 이후 꾸며진 순천
박씨의 족보는 물론이려니와 그 내외가의 족보도 허술하기 짝이 없다.

더구나 당시는 왕조실록조차 자유롭게 참고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다만 전해들은 얘기만을 토대로 이를 복원해낼 수밖에 없었을 터이니
정확성이 결여될 것은 당연한 일이다.

혹시 금석문자가 있었다 해도 모두 참화에서 벗어난 한참 후대에 이루어진
것이었으므로 그조차 신빙성이 희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한번 기준을 잘못 잡고 나면 그 기준을 중심으로 합리적인 전개를
부여함으로써 줄줄이 잘못되는 오류를 낳기도 했던 듯하다.

그러니 박팽년의 행장을 바로잡으려면 "박선생유고"에 남겨진 박팽년의
글과 왕조실록에 수록된 각종 관련기사 및 박팽년 내외가의 족보나 각
지방의 읍지 등을 광범위하게 비교 고찰하여 오류를 합리적으로 교정해가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떠맡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첫번째 부딪치는 것이 박팽년 외조부 김익생의 존재이다.

박중림이 세종5년(1423) 문과에 급제한 "문과방목"에서 분명히 처부, 즉
장인의 이름이 김익생이라 하였고 세종16년(1434) 박팽년의 문과 급제시
"문과방목"에도 외조가 김익생이라 하였으니 김익생이 박팽년의 외조부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 하겠다.

그런데 박팽년이 세종26년(1444)에 임금께 올린 "걸군장"에서는 그
외조부모가 충청도 신창에 살며 각기 70세와 74세라고 하고 있다.

그러면 외조부 김익생은 1375년생이고 외조모는 1371년생에 해당한다.

박중림이 1400년 전후해서 출생한 것이 확실하니 그 무남독녀 외딸이
박중림의 처라면 부모와의 나이차도 적당하다.

그래서 "신창읍지"를 찾아보니 이 시기에 살았던 김익생이란 인물이
인물조에 효자정문까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그 효자정문이 있다는 남면 판방리를 찾으니 현재 아산군 신창면
도산리가 그곳으로 그 후손이 묘소와 정문을 지키고 있다.

그런데 "순천박씨족보"에서는 김익생을 안동 김씨라 하였으나 이 후손은
김녕 김씨라고 한다.

그래서 그 족보에서 확인하니 김익생은 박팽년과 함께 순절한 김문기(1399
~1456)의 3종숙(9촌 아저씨)에 해당한다.

결국 박팽년과 김문기의 친척관계가 성립되고 있었다는 얘기인데 "세종
실록" 권4 세조2년 병자 6월 8일 병오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어 이를
사실로 증명한다.

"문기와 박팽년은 족친이 되고 또 가깝게 사귀었다.

문기가 그때 도진무가 되어 팽년 삼문과 모의해 이르기를 "다만 자네들은
안에 있으면서 일을 이루기만 하라.내 가 밖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있으니
비록 어기어 거역하는 자가 있더라도 제압하는데 무엇이 어렵겠는가"

그렇다면 "순천박씨족보"에서 김익생을 안동 김씨라 한 것이 잘못이라
해야 할 터인데 이런 오류가 발생한 것은 박중림의 외삼촌들이 김익정(1375~
1436)과 김익렴이기 때문에 김익생도 이들과 항렬이 같은 선안동 김씨로
착각한 데서 말미암은 것이 아닌가 한다.

김익정은 박중림의 큰외숙으로 태조 5년(1396) 근정전 친시과에서 장원
급제한 재사였는데, 재주뿐 아니라 인물도 빼어나게 잘 생겨서 일찍이
태종의 눈에 띄어 태종대에 청요의 직책을 두루 거친 다음 세종이 세자가
되었을 때는 세자시강원 보덕으로 발탁되어 세종의 측근이 된다.

그래서 세종이 즉위(8월 8일)하자 마자 8월 21일 좌부대언, 즉 좌부승지가
되어 우대언 좌대언을 차례로 거치면서 세종 2년(1420) 12월 9일에는 지신사,
즉 도승지에 오르고 세종 4년(1422) 12월 12일 파직될 때까지 항상 세종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모시는데 태종과 세종이 베푸는 사사로운 연회좌석
마다 빠지지 않고 시연할 정도로 총애를 받았었다.

결국 국왕과의 이런 근밀한 관계가 뭇 사람들의 시기를 사게 되어 하찮은
일로 파직되지만 충청도관찰사 예조참판 대사헌 형조참판 이조참판 호조참판
한성부윤 전라도관찰사 경상도관찰사 등을 역임하고 세종 15년(1433)과 세종
16년 양차에 걸쳐 하정사와 성절사의 정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다.

특히 세종 15년 하정사가 되었을 때 부사는 누이의 손자인 박팽년의 장인
김익생이었으니 사돈간에 정.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셈이다.

이 김익정은 절재 김종서의 재종형에 해당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김종서는 "단종실록" 권2 단종 즉위년(1452) 임신 7월4일 을미조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김종서가 이르기를...

김익정은 바로 내 재종형이라 내가 사람됨을 상세히 안다.

염치와 절개를 스스로 지키고 신의와 과단을 스스로 기약하였으니, 국량이
좁다고 한다면 그럴만 하지만 사헌부의 장이 되어서 남의 뇌물을 받았다면
결단코 그리하지 않았으리라"

재종형제의 촌수가 성립되는 것은 김종서의 조모가 선산 김씨 우류의
따님이라 하였고 김익정의 모친이 선산 김씨라 하였으니 김종서의 조모가
김익정 모친의 고모가 됨으로써 선산 김씨를 같은 외가로 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김익정의 생질인 박중림과 김종서와도 척분이 생기게
되어 김종서가 박중림을 대사헌으로 천거하면서 그가 그의 족인이라 하였던
것이다.

그 내용을 옮겨 보겠다.

"단종 원년(1453) 계유 7월 28일 계미.

박중림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하다.

노산군이 황보인 김종서 정분 박중손 신숙주를 인견하고 이르기를 지금
대사헌을 삼을 만한 사람이 누구인가.

인 등이 이르기를 박중림이 가합니다.

종서가 이르기를 중림이 사람됨이 겉으로는 느리고 풀어진 듯하나 그러나
그 마음가짐이 굳세고 행실 또한 간결하여 시끄러운 선비가 아닙니다.

요사이 사헌부에서 일을 의논하는 것이 사정에 연유되는 듯하여 마땅히
쫓아내야 할 듯하나 그러나 법사는 마땅히 우대하고 용서해야 하므로 신들이
의논하여 다만 좌천시키도록 아뢰니 바깥 사람으로 신 등을 꾸짖는 이들이
심히 많습니다.

그러나 신들이 어찌 그 사이에 한 터럭만큼이라도 사의가 있겠습니까.

지금 소유배들이 대체를 생각하지 않고 걸핏하면 비방하고 헐뜯어 국사로
하여금 끝내 이루어지지 않게 하고 있으니 자못 옳지 못합니다.

마땅히 생각이 깊고 시끄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얻어 헌사의
장이 되게 하여야 동료들의 의견을 조절하여 고르게 할 것입니다.

박중림은 신의 족인입니다.

진실로 사헌부의 직임을 맡을만 하기에 그를 천거하였을 뿐 또한 사의에서
나오지는 않았습니다"("단종실록" 권7)

결국 김종서는 박중림의 외숙인 김익정의 재종 아우가 되므로 박중림에게는
외가로 재당숙이 되는 셈이다.

그래서 박팽년 집안을 중심으로 김종서 김익정 김익생 집안이 모두 일가
친척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김익생에게 몇가지 해결해야 할 문제점들이 남아 있다.

우선 "김녕김씨족보"에서 김익생의 생졸년을 1388년에 나서 1450년에
돌아간 것으로 하고 있다.

63세를 살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팽년 "걸군장"에서는 벌써 세종 26년(1444)에 70세라고 하였으니
무려 13년의 시차가 난다.

만약 1450년, 즉 세종 32년에 돌아간 것을 인정하고 세종 26년에 70세라고
한다면 돌아갈 때 나이가 76세가 되어야 한다.

김익생이 분명 세종 25년(1443) 2월 6일에 중추원부사로 임명되고 있으니
박팽년이 상소하는 세종 26년까지 살아 있을 가능성은 농후하고 세종 32년에
돌아갔을 가능성도 높다.

그런데 김익생이 세종 22년(1440) 10월 22일에 경주 부윤이 되어 내려가서
다음해에 정2품 자헌대부로 품계가 오르자 이를 기념하기 위해 빈현루라는
강무소를 짓고 안평대군에게 그 당호를 지어 써달라 하고 정인지에게 그
기문을 지어달라고 하여 모두 새겨 걸어놓는다.("경주읍지")

그렇지만 이 빈현루를 지은 해인 세종 23년(1441) 12월25일에 사헌부에서는
길사순이 경주판관의 적임자가 아니라는 상소를 올리면서 김익생이 나이가
늙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경주 부윤 김익생은 비록 무인이기는 하나 지금 이미 연로하므로 판관은
반드시 무인을 써야 합니다"

만약 "김녕김씨족보"에서 밝히고 있는 나이대로 라면 이때 김익생의
나이는 54세밖에 안 된다.

이런 나이를 연로하다고는 표현하지 않는다.

그런데 박팽년이 세종 26년(1444)에 70세라고 한 나이로 따지면 67세이다.

이만큼 되어야 비로소 연로하다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러니 김익생의 생졸년을 따질 때, 박팽년이 밝히고 있는 내용이 "김녕
김씨족보"에서 밝히고 있는 내용보다 훨씬 더 다른 공식기록과 합치되는
합리성을 보인다 하겠다.

더구나 세조 3년 정축(1457) 3월 23일 난신들의 전지를 종친과 대신들에게
나누어주는 기사에서 박중림 박팽년 박기년 박인년 박대년 박중림 6부자와
박중림의 사위인 봉여해의 신창전지를 영천부원군 윤사로에게 하사하고 있는
것으로 보면 필연 이 전지들이 모두 김익생으로부터 분재되어 박씨 일가가
물려받은 것들이었을 것이다.

김익생은 박중림의 장인으로 또 박팽년의 외조부로서 연좌죄를 면치
못하여 비록 이미 서거한 뒤였지만 관직이 추탈되고 직첩을 환수당하였던 듯
성종 21년(1490) 7월 7일에 큰 비와 큰 벼락 천둥 등 천변에 대응하는
대사면이 내려질 때 직첩을 환급받는다.

실로 34년만의 복권이었다.

이상의 여러 사실로 미루어 보면 박팽년은 분명 김익생의 외손으로 현재
김익생의 묘소가 있는 도고산 자락의 도산리 김익생 구택에서 출생한 것이
분명하다고 하겠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8월 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