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고 부드러운 경상도 사투리의 음성은 백옥자의 다정다감한 목소리다.

그처럼 자기를 질리게 만들었고 또 정신병원까지 찾아가 의사와 면담을
하게 했던 바로 그 마음씨 착하고 한없이 참을성을 보여주어서 너무도 믿고
의지했던 바로 그 여사님이다.

그는 순간 목이 콱 메어서 대답하기가 힘들다.

"여보세요. 지영웅입니다"

"아, 나예요. 백옥잡니다"

그녀의 음성도 감격으로 떨려 나온다.

얼마나 그리웠던 남자인가.

"내 음성을 잊은 것은 아니지요?"

"네, 잊고 싶은 음성이었습니다. 그렇게 감쪽같이 숨어버릴 수가
있습니까?"

지영웅도 점잖게 받는다.

전 같으면 배신자라든가, 아무튼 험악한 말이 튀어 나올 터이지만 그는
지금 영 다른 사람으로 변신하고 있는 중이다.

좀 더 우아하게, 좀 더 사나이답게, 떳떳하게 대하는 것으로 지난 날의
자기의 추악했던 행동들을 반성하고 바르게 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말씨가 영 다른 사람 같네요"

백옥자가 혹시 다른 사람은 아닌가 의심하면서 묻는다.

"저, 지영웅씨 맞지요?"

"맞습니다. 그런데 소식도 없이 있다가 갑자기 웬 일 이십니까?"

"미안해요. 그때 약속 못 지킨것. 사실 나는 그때 교통사고로 머릴
다쳐서 기억력을 잃고 두달이나 입원해 있다가 최근에야 제정신이
들었어요"

"그런 걸 저는 오해를 했었군요. 저를 배신한 줄 알았습니다. 그래
지금은 어떠십니까?"

"다른 곳은 안 다치고 머리만 다쳤으니까 지금은 이제 완쾌돼서 전화를
하는 거지요.

삐삐도 했는데 응답이 없어서 오늘은 사무실로 한 거에요.

미안합니다, 근무중이시지예?"

그녀는 언제나 무공해 식품처럼 여유있고 부드러운 여자다.

어쩌면 김영신과 많이 닮은 그녀를 또 얼마나 좋아했고 큰 기대와
희망속에서 살았던가?

그러나 이제 백옥자는 김영신의 그림자에 가리는 초라한 민들레가 됐다.

그만큼 그는 김영신에게 매료되어 있다.

그는 자기가 무식했기 때문에 중학교 출신에 마음씨만 착한 백옥자는
성에 차지 않는다.

"지영웅씨, 약속 못 지킨 것은 그래서였구요, 다시 만나주실 수
있겠어예? 나와 같이 덕산골프장에서 찍은 사진도 잘 나왔는데 드리고
싶어요. 배우같이 잘 나왔어예"

그때서야 그는 그녀와 지방으로 골프치러 갔던 생각이 난다.

그러나 아무리 그녀가 마음씨가 착한 미망인이라 하더라도 이미 그녀와는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이 없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8월 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