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가 기아그룹의 부도유예조치 직후 추진되고 있는 정부의 또 다른
대기업 정책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부채가 많은 기업은 무조건 "부도덕한"기업으로 몰아붙여 재무구조를
인위적으로 개선시키겠다고 한 것이 바로 어제인데 또 어떤 정책으로
기업을 옭아맬지 우려돼서다.

재정경제원을 중심으로 추진되고 있는 새로운 대기업정책은 기업퇴출제의
전면정비가 골자다.

부실기업의 퇴출이 제때에 이뤄지지 못해 나중에 더 큰 국민경제적 부담을
주는 일이 없도록 경영이 어려운 기업은 쉽게 정리될 수 있도록 한다는
취지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사실 기업이 경영위기에 몰리거나 대주주가 더 이상 사업할 의지가 없을
때 즉시 퇴출할 수 있도록 하는 기업퇴출제의 정비는 사업구조조정이라는
시대적 과제에 부합되는 것이긴 하다.

이렇게 그 필요성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걱정의 소리가 새나오는 이유는
우선 정부가 사용하려고 하는 정책수단에 상당한 문제가 있다는 판단 때문
이다.

<>M&A(기업인수합병) 활성화 <>소유와 경영분리를 전제로 한 지주회사
설립 <>고용조정 촉진 등의 수단은 현실적으로 여건이 조성돼 있지 않을
뿐더러 정책수단으로서 실효성도 적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먼저 M&A 활성화의 경우.재계는 대주주의 경영권 안정이 보장되지 않는 현
상태에서 정부의 방침대로 적대적 M&A까지 활성화될 경우 우리 기업들은
생산 투자 영업 등 본연의 경영활동보다는 경영권 보호에 힘을 낭비할 수
없다고 반발하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관계자는 "국내기업들이 자사주한도 상호출자금지
총액출자제한 소유분산우량기업지정제 등으로 꽁꽁 묶여있는 상태에서
외국인투자자들이 적대적 M&A에 나설 경우 우리의 산업주권까지 흔들릴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소유와 경영 분리를 전제로 한 지주회사 설립에 관해서도 재계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지주회사 자체가 계열사들의 효율적 지배를 전제로 만들어지는 것인데
그 지주회사에 대해 소유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하는건 개념자체를
모르고 있는 것이라는 지적이다.

모그룹 관계자는 "지주회사의 필요성을 잘 아는 정부가 그동안 지주회사
불허나 지주회사 역할을 하고 있는 기조실 폐지등을 주장해 왔던 논리에서
후퇴하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만든 고육책으로 볼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고용조정촉진의 경우도 재계 관계자들은 그 실효성을 의심하고 있다.

새노동법에서 정리해고를 2년 유예해 놓은 상황에서 사용할 고용조정촉진책
이 없다는 것이다.

특별법을 만드는 방법이 있을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노동법사태와 같은
진통이 나타나지 않으리란 장담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재계 관계자들은 그래서 이렇게 무리한 정책수단으로 새로운 정책을 추진
하는 정부에 곱잖은 눈치를 보내고 있다.

기업퇴출제를 제대로 시행한다는 것은 어떤 대기업의 경영위기도 책임지지
않겠다는 정부의 의사표시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오비이락격이긴 하지만 기아를 이 지경이 되도록 놓아둔 금융기관과 그
통제권을 실제적으로 행사하고 있는 정부가 여론의 화살을 비껴가기 위해
선택한 정책 아니냐는 것이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큰 사건이 있을 때 마다 정부가 대증요법으로 새로운
정책을 만드는 것 자체가 문제"라며 "책임을 지지 않겠다면 권한도 과감히
버려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 권영설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7월 1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