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기업들이 동남아에 구축한 아성은 난공불락인가"

지난달 발행된 미국-아세안 협회의 연례보고서의 부제목이다.

이 보고서는 "일본기업들이 이 지역에서 워낙 폐쇄적인 생산.판매
네트워크를 짜놓아 그것이 외국기업들에는 일종의 불공정 교역장벽이나
마찬가지"라고 결론짓고 있다.

태국의 경우를 보자.

이 나라는 산업정책을 짜는 과정에서 재계의 의견을 듣는다.

하지만 이 나라의 재계라는 것이 일본계 일색이다.

일본기업들이 태국의 산업정책에 미치는 영향력은 일본국내에 버금갈
정도다.

이를테면 태국 자동차공업협회장인 닌랄트 차이티라피뇨씨는 도요타의
현지 자회사 이사이자 도요타 하청기업들의 모임인 도요타클럽의 자문역이다.

이 사람의 입김은 태국의 자동차산업 정책입안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계 경쟁업체들이 태국에 발을 들여놓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작년 GM의 경험이 그 단적인 사례다.

당시 GM은 태국진출을 위해 내년까지 태국의 자동차관련규정을 미국메이커
실정에 맞도록 고쳐줄 것을 태국정부에 요청, 내락을 받아냈었다.

이 내락은 법제화 과정에서 백지화됐다.

GM은 "물증은 없지만 누가봐도 일본인들이 로비한 결과"라고 흥분한다.

크라이슬러의 체로키사건은 동남아의 일본파워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또다른 사례다.

지난 91년 크라이슬러는 4륜구동 체로키 모델을 태국에서 선뵈기로 했다.

태국당국은 전폭 지원을 약속했지만 막상 생산 허가단계에 가서 전혀
예기치못한 제동을 걸었다.

태국측은 체로키를 스포츠카로 분류, 차값의 38%에 달하는 특소세를
메겼다.

체로키와 경쟁인 일본 미쓰비시 파제로의 세율은 10%에 지나지 않았다.

미쓰비시 파제로는 세금이 싼 픽업트럭으로 간주됐던 이다.

클라이슬러가 체로키 세금을 파제로 수준으로 낮추는데 3년이 걸렸다.

그것도 USTR(무역대표부)까지 가세한 관민합동작전의 결과였다.

미국-아세안 협회는 "미국기업들의 고전이 주로 일본기업의 배타적인
계열화로 인한 현지 하청의 어려움 등에서 비롯된다"고 진단한다.

지난 90~96년기간중 미국의 동남아수출은 1백29% 급증했지만 미국 제품의
시장점유율은 1.4%나 감소했다.

이 기간중 일본의 시장점유율은 2.5%나 늘어났다.

일본기업의 마켓셰어확대에 따라 자본 유입도 급증추세다.

지난 한햇동안에만 이 지역에 쏟아져들어간 일본자금이 무려 70억7천6백만
달러.

이중 상당액은 원조형태를 띠고 있지만 이 역시 일본기업이 터전을 다지는
데 윤활유역할을 해왔다.

미국-아세안협회는 "일본이 고급기술을 한국 대만 말레이시아 등에
이전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자본재를 팔기 위한 마케팅전략의 하나"라고
진단한다.

일본 수출기업들의 동남아 장악은 이미 완성됐고 이젠 내수기업들이 이
지역에서 자체상권을 다져나가는 단계에 이르렀다.

일본 무역진흥회의 조사에 따르면 지난 95년에 밖으로 나간 일본 중소기업
중 90%가 동남아로 갔다.

이중 30%가까이가 내수형소비재 기업들이다.

미쓰비시 미쓰이 양대회사가 태국에서 운영중인 조인트벤처만 1백80개를
헤아린다.

일본의 경쟁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분야까지 동남아에선 차별적인 이익을
챙긴다.

엘리베이터가 그렇다.

연초 미국의 오티스 엘리베이터는 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 신공항의
엘리베이터 발주에 참여하려했지만 문전박대당했다.

신공항프로젝트의 일본인 기술고문과 공사를 맡은 건설회사들이 "일제
엘리베이터에 익숙하고 기술적으로 신뢰감이 높다"는 이유로 미국제는
검토대상에 끼워주지도 않았다.

야마무라 코조 미국 워싱턴대학 경영학 교수는 "일본의 동남아진출은 워낙
광범위하고 조직적으로 추진돼 왔기때문에 외국의 후발진출기업들은 차라리
일본기업과 제휴하는 방식을 검토하는 것도 대안일 수 있다"고 충고한다.

< 이동우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7월 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