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신문의 지난 6월28일자 토요에세이 는 참으로 오랜만에 읽어보는
시원한 글이고 이에 천번만번 동감하는 바이다.

문득 며칠전에 배웠던 고사성어가 생각난다.

엄이도령이란 모든 사람들이 그 잘못을 알고 있는데 얕은 꾀로 남을
속이려 한다는 뜻이란다.

토요에세이 에서 필자는 교사들 촌지에 대해서만 언급을 했지만 나는 좀더
우리사회의 전반적인 상황에 대해 생각해 보고 평상시에 늘 궁금하면서도
어느 누구에게 물어야할지 몰라 전전긍긍했던 궁금증을 이 지면을 빌려
누군가에게 묻고 싶다.

중학교 1학년이 된 아들이 초등학교때에는 매달 5만원씩의 봉투를 들고
선생님을 방문했다는 선배의 이야기에 입에 거품을 물고 교육제도와
선생님들의 행태를 비판하면서도 결말은 항상 그래도 챙겨가야 한다 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참 답답했었다.

한술 더 떠서 이번 신문기사를 접한 아이들의 어머니들은 "어머, 나는
너무 조금했어. 다음부터는 액수를 올려야 할까봐"

결국 이번 기사는 홍보효과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다른 아이의 어머니가 가져다 주는 것은 나쁜 것이고 자신의 행동은
내 아이를 위한 어미의 사랑으로 생각하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얼굴이다.

소위 사회지도층에 있는 분들이 직무와 관련해 받은 뇌물때문에 구속되는
뉴스를 보며 옆에 있는 남편이 솔직히 바보로 보였다는 선배의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나의 남편 우리 아버지가 한탕치면 능력있고 좋은 직장이고, 남의 남편
남의 아버지의 경우는 사회를 말아먹는 나쁜 사람이라는 이중잣대를 당당히
쥐고 사는 우리네 모습이다.

다시 한번 생각한다.

내 자신이 엄이도령의 표본이 아닐까.

남이 하는 것은 사회의 독버섯이고 내가 하는 행위들은 살아가기 위해서
당연한 것들이라고 스스로 정당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토요일 오후 하루일과를 마치고 회사문을 나서는 마음이 행복하다.

뜨끈뜨끈 내리쬐는 태양의 손길이 감미롭게 느껴진다.

내일 일요일 아침에 한강 고수부지에서 강길 따라 조깅할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마음이 설렌다.

비록 골프와는 비교도 안되겠지만 느끼는 행복감은 분명 그에 못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

남의 잘못만 나발불지 말고 나 자신을 돌아보아야지.

내 아이가 조금 소외되더라도 어차피 인간사회는 서로 협력하는
공동체임을 알려주어야지.

우리사회는 분명 보이지 않는 위대한 힘에 의해서 부단히 정화되고 있다는
믿음을 버리지 말자.

멀지않은 장래에 불혹을 바라보는 내가 궁금해 했던 의문들이 풀릴 날이
올 것이라는 믿음과 함께 나는 냄비에 물끓듯이 변화무쌍한 우리의 사회를
사랑한다.

좀더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위해 노력하는 모든이들에게 건투를 빈다.

윤귀옥 <서울 서초구 방배3동>


(한국경제신문 1997년 7월 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