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께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었다.

온 세계의 관심을 끌었을 만큼, 그것은 상징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중요한
사건이었다.

근대 유럽의 팽창은 1410년대에 포르투갈의 해외 탐험으로 시작되었다.

우아한 "캐러벨"로 이루어진 포르투갈 함대는 "항해왕" 앵리케의 지도아래
서아프리카 해안을 탐험했고, 1498년엔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에 닿았다.

그보다 여섯해 앞서 콜럼버스는 아메리카 대륙을 재발견했다.

마침내 16세기 말엽엔 왜군을 따라 "야소회"소속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조선 땅을 밟았다.

그 뒤로 "과학 혁명"과 "산업 혁명"의 도움을 받아, 유럽 세력은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유럽 세력의 그런 우세는 물질적 분야만이 아니라 정신적 분야에서도
절대적이었다.

유럽문명이 워낙 우수했으므로, 다른 문명들은 그것에 맞설 수 없었고
그들에게 생존은 유럽 문명의 성공적 흡수를 뜻했다.

지금 모든 사회들에서 지배적 이념과 제도들은 모두 유럽에서 나온
것들이다.

따라서 유럽 문명을 가장 성공적으로 흡수한 나라인 일본이 맨 먼저 유럽
세력에 맞선 것은 이상하지 않다.

1904년 일본이 러시아에 싸움을 걸었을 때, 일본의 승리를 예측한 사람은
드물었다.

유럽의 위세가 하늘을 찌르던 그때, 아시아의 소국이 유럽의 대국에
이기는 것을 상상하긴 힘들었다.

그래서 일본의 승리는 유럽의 압제에 시달리던 사람들에게 큰 충격과
용기를 주었다.

영국 문필가 에드워드 다이시의 말대로, "토착인 군대들은, 아무리
용감하더라도 유럽 군대들에게 패배하게 마련이라는 확신이 뿌리째
흔들렸고", 유럽 세력의 핍박을 받던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나라들에서
독립 운동이 치열하게 일어났다.

그러나 일본의 승리가 아시아에 독립과 번영을 불러오리라는 기대는 헛된
것이었다.

일본은 이미 조선을 강점하고서 식민지배 체제를 굳히고 있었다.

그 뒤로 반세기 동안 일본은 유럽의 제국주의에 깊이 물든 사회가 얼마나
큰 재앙인지 처절하게 보여주었다.

그래서 전쟁사가 존 풀러가 "1453년의 콘스탄티노플 함락과 함께 역사상
몇안되는 정말로 큰 사건들 가운데 하나"라고 평한 "여순 함락"의 뜻이 거의
잊혀진 것은 당연했다.

노-일전쟁이 일어난지 꼭 반세기만에, 유럽 세력의 압제에 대한 저항의
역사에서 아주 큰 뜻을 지닌 일이 다시 동아시아에서 일어났다.

1954년 5월7일 베트남 서북부 프랑스 군의 디엔 비엔 푸 요새가 55일
동안의 포위 끝에 베트민 군에 항복했던 것이다.

이 승리로 베트남의 북반부는 이내 독립을 얻었으니, 유럽 세력의
식민지로 전락한 민족이 싸움터에서의 승리로 독립을, 주권을 되찾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안타깝게도, 유럽 세력에 대한 승리는 이번에도 평화와 번영을 가져오지
못했으니, 디엔 비엔 푸의 승리에서 거의 반 세기가 지난 지금도 베트남은
아주 가난하고 압제적인 사회다.

그렇게 된 데엔 외세를 물리치고 온전한 독립을 쟁취할 만큼 베트민의
세력이 크지 못했다는 사정도 있었지만, 보다 근본적 원인은 그들이
공산주의에 깊이 물들었다는 사실이었다.

중국 캄보디아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보듯, 유럽 세력이 동 아시아에 끼친
해악은 그들의 직접적 행동보다도 그들이 퍼뜨린 공산주의라는 그릇된
이념에서 훨씬 크게 나왔다.

근년에 동아시아 사람들은 유럽 중심의 고정관념 하나를 다시 깨뜨렸다.

유럽의 "개신교 윤리"가 자본주의 발전의 원동력이라는 막스 베버의
주장이 나온 뒤로, 갖가지 이론들이 비유럽 사회들의 경제적 낙후가 피할
수 없는 운명임을 알게 모르게 가르쳐왔다.

역사상 가장 빠른 경제성장을 이룸으로써, 동아시아 사람들은 자신들을
유복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다른 뒤진 사회들의 시민들에게 경제적 풍요로
가는 길을 보여주었고 자유주의 경제학이 융성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걱정스럽게도, 그런 경제적 성취는 정치적 성취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

동아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병력이 모여있고 군비가 두드러지게
늘어나는 지역이다.

한반도를 비롯해서 분쟁 지역들도 많다.

그러나 그렇게 큰 전쟁의 위험을 안고 있으면서도, 동아시아는 역내의
군사문제를 상의할 국제기구 하나 갖추지 못한 형편이다.

유럽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활용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홍콩의 반환은 동아시아가 유럽 세력의 진출로 잃었던 위엄과 영토를
거의 되찾았음을 상징한다.

이제 유럽 세력에 넘어간 땅은 연해주 뿐이다.

그러나 1860년 러시아가 영국과 프랑스의 공격을 받은 중국에 외교적
도움을 주고 대가로 받은 연해주는 영구적으로 러시아의 땅으로 남을 것이다.

영토에 관한 한 유난히 제국주의적 행태를 드러내는 중국도 연해주는
"찾아야 할 고토"로 여기지 않는다.

이제 동아시아는 빠르게 모습을 갖춰가는 "지구 제국"의 일원으로 맡은
몫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역내에 평화적 질서를 마련해야 한다.

그것은 물론 무척 어려운 과제다.

그러나 난센이 말한대로, "어려운 일은 조금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불가능한 일은 조금 더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1950년대 양차 대전의 잿더미위에서 통일 유럽을 꿈꾼 사람들이 그 사실을
일깨워준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7월 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