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승부근성을 어느 정도 물려 받은 영신은 20여년동안 실크무역을
해오면서 익힌 비즈니스에서의 치밀한 두뇌를 이번에는 남편과의 이혼
시도에 이용하여 자기 테스트를 한다.

그녀가 잘못된 결혼을 아직 정리하지 못하고 이렇게 끌어온 것은 순전히
어머니 때문이었다.

결혼은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비즈니스로 처리하면 안 된다는 어머니
나름의 도덕적 해석 때문이었다.

그러나 김영신은 가망이 없는 비즈니스에서 손을 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정이라고 우기곤 했다.

모녀가 의견을 달리하는 유일한 쟁점은 결혼에 대한 도덕적 해석이었다.

그녀는 속으로 어머니에게 말한다.

< 어머니 내가 맞았어요. 다 곪아서 가망없는 비즈니스는 일찍 정리해야
피해가 덜 했어요.

어머니, 윤효상은 이미 우리의 결혼을 망가뜨리고 있었어요.

어머니의 말에 순종해서 나에게 남은 것이 무엇입니까? 제발 나를
가만히 두십시오. 이번에는 나서지 마세요 어머니 >

그녀는 마음으로 어머니와 대화를 하다가 문득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아버지, 어머니에게 이번 사건에 개입해서 나를 곤란하게 만들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고 싶어요.

어머니에게 오더를 내려주세요.

만약 그런 약속이 안 되면 저는 정말로 부모님을 괴롭혀드릴 수도
있어요.

이건 협박이 아닙니다.

나는요, 윤효상과 같은 비겁자와 사느니 차라리 동물원의 원숭이와
살겠어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요.

윤효상씨, 제 말을 잘 들으세요.

미스 리와 내가 만났을 때 나는 그녀의 육성을 녹음해가지고 왔어요.

더 이상 트릭을 쓰지 말아요.

더 비겁하게 인상지어져도 괜찮다는 배짱이라면 몰라도. 아셨어요?
김영신은 어떻게 보면 무능한 점도 있지만 바보는 아닙니다"

그러자 윤효상의 얼굴이 푸르게 일그러진다.

도둑질하다가 들킨 아이의 모습이다.

"나는 더 이상 당신의 변명을 듣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까 귀찮고 창피스럽게 굴지 말고 빨리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으세요"

영신은 세번째로 자기를 매혹시킨 지영웅이 압구정동 지글러임을 모른다.

만약 그가 영동을 주름잡는 지글러요, 나이 많은 부인들을 울리는
제비라는 사실을 안다면 그녀가 이렇게 용감할 수 있었을까?

천만에. 그녀는 육체적으로는 둔감한 여자였으므로 결코 새로운 남자가
가장 이상적이라든가 따위의 어리석은 기대는 안 했을 것이다.

40이 넘으면서 철이 들자 그녀는 자기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신앙은
사업밖에 없다는 경험을 가지고 있다.

비즈니스에 열중해서 그것에 매달리면 돈은 절로 자기 것이 된다.

그러나 남자는 그렇지 않다.

그것은 영신이 남자보다 자기 성취나 돈을 버는데 매달린 마력도
되었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6월 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