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에서 내릴 때쯤 영신이 그의 손을 꼬옥 잡으며 조용히 말한다.

"당신은 짐승같은 사람이야. 그런 남자라구. 그러나 거기에다 문화적이고
지적인 매력을 키우면 정말 일등품으로 수출할 수도 있는 국보급 사나이가
될 수 있을 것 같애. 당신의 그 남자같은 점도, 순수한 정열도 높이
사지만 최고를 원한다면 지적 노력을 해야 될 사람인 것 같아요. 호호호호"

그녀는 마지막에 가서 상냥하게 웃으며 그의 푸른 수염이 까실한 뺨을
곱게 쓰다듬는다.

귀여운 아이에게 엄마가 하듯이.

"고마워요. 나를 여자로 꽃피게 해준 것 정말 고마워요"

지코치는 이렇게 고마워할 수 있는 여자에겐 정말 약하다.

"당신은 내가 만난 여자중에 최고야. 나는 수녀 같기도 하고 창녀같기도한
여자에게 장가를 가고 싶었거든. 하느님에게 고마워하고 있어"

그들은 용감하게 비행기안에서 가볍게 키스를 한다.

무척 짧은 찰나지만 지영웅은 그 사랑의 키스에 가슴이 울렁거리는
감동을 받는다.

나는 이 여자가 정말 좋다.

나이는 많지만 그래서 더 믿음이 가고 편안하다.

"사랑해요. 나를 버리지 말아요"

지영웅은 얼마나 정직한 사나이인가? 나이 많은 자기에게 그렇게도
몰두해준다는 것이 영신에게는 정말 눈물나게 고맙고도 감격적이다.

그러나 김포공항에 내리자 마자 어떻게 알고 마중을 나왔는지 많은
사람들 속에서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 김영신의 남편 윤사장 때문에
순간적으로 인사도 못하고 헤어지고 말았다.

지영웅은 갑자기 슬퍼져서 시무룩한 모습으로 바퀴달린 가방을 끌고
혼자서 택시에 올라탄다.

너무나 예상 이외의 헤어짐이었다.

그들은 같이 압구정동까지 가기 위해 삼성동 에어터미널까지 가서
커피라도 한잔 하고 헤어질 요량이었던 것이다.

지코치는 버림받은 아이처럼 처량하게 택시속으로 들어가면서 싱글거리며
잘 가라는 인사를 하는 민영대 가이드에게 민망한 기분으로 빠이빠이 했다.

그리고 일행들 누구와의 인사도 없이 버림받은 아이처럼 매연에 싸인
서울 시내로 진입하는 택시속에서 눈을 감고 있었다.

이제 그는 다시 비정한 현실속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에게는 돌아가야 반가워할 아무도 없다.

오후 일곱시쯤의 황제 오피스텔 앞은 여전히 붐비고 인파로 넘실대고
있다.

지영웅은 우울한 모습으로 트렁크를 내리고 택시비를 계산해 준후 낯익은
출입구앞으로 트렁크를 밀고 간다.

그러나 그는 몹시 서글펐다.

언제나 그랬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늘 그랬다.

마음으로 의지할 데가 없다.

바로 이때 누가 그에게로 다가와 뒤에서 탁 치며 오빠하고 외친다.

오빠라니, 그는 휙 돌아다 보다가 깜짝 놀란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6월 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