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경원이나 증권감독원이 루머를 잡겠다고 엄포를 놓지만 기대도 하지
않습니다. 신문에 루머 단속한다는 기사가 벌써 몇번째입니까"

자금악화설로 최근 곤욕을 치른 A그룹 비서실장이 울분을 삭이며 내뱉은
말이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이제는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 자체가
무섭다"는 그는 "이대로 가다간 루머가 나라경제를 망치고 말 것"이라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불황과 함께 루머가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만큼 기업 은행 등 이해관계자는 물론 일반인들까지 루머가 판치는
경제의 앞날에 대해 불안해 한다는 증거다.

우성그룹은 지난해 부도가 나기 직전 갖가지 루머에 시달리다 못해 "루머
사전진압반"이라는 팀을 운영했다.

기획실 임직원들로 팀을 구성해 증권사 사채시장 종금사 등 이른바 루머의
양산지로 알려진 곳을 샅샅이 뒤졌으나 성과는 없었다.

밑도 끝도 없이 나타나 기업을 요절내고 만다는 루머는 그러나 마땅한
대책이 없는게 현실이다.

막으려고 할수록 오히려 더 커지고 신뢰감을 얻는게 속성인데다 소문의
진원지를 찾아내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기업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어야 하는가.

장기적으로는 루머 자체의 발생을 원천봉쇄하는 기업의 "투명경영"이,
단기적으론 "위기관리 경영체계"의 확립이 시급하다는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작년말 자금악화설에 곤욕을 치렀던 B그룹은 루머와 함께 주가가 폭락하고
자금회전에 문제가 생기자 곧바로 진화작업에 나섰다.

전담팀을 구성, 언론사 은행 채권업체 등을 찾아다니며 필사적으로 경영
상황을 설명했다.

대본은 자금부서에서 주주들을 관리하는 IR팀이 작성했다.

한편으론 그룹에 대한 좋은 소식을 소문으로 퍼뜨리는 "구전홍보"를
병행했다.

그 결과 반년여만에 부도설의 불길을 벗어날 수 있었다.

이 그룹의 홍보담당 C이사는 "일단 루머가 번지면 전사적으로 대응해
보지만 좀처럼 헤어나기 힘들다"며 "루머 등에 대비한 쳬계적인 위기관리
매뉴얼이 아쉬었다"고 말했다.

수원대 신문방송학과 최윤희교수는 "기업의 사후대응이란 결국 루머의
확산속도나 범위를 줄이는 역할 밖에는 못한다"며 "진정한 의미의 위기관리
란 루머 자체를 사전에 방지하는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궁극적으로는 기업이 투자자 등에게 정보를 정직하게 공개하는 "투명경영"
만이 루머없는 경제를 만든다는게 전문가들의 한목소리다.

미국처럼 기업과 투자자 사이의 신뢰관계가 형성된 선진국에선 루머 때문에
기업이 망한다는 사례가 없다는 것이다.

서강대 경영학과 최운열교수는 "기업들은 당장의 위기를 넘기자는 생각에
불리한 정보를 은폐하려는 유혹을 받게 되지만 기업이 모든 정보를 공시를
통해 투자자들에게 알리겠다는 자세를 가져야 신뢰관계가 형성된다"고 강조
했다.

루머만 돌았다하면 사실확인도 없이 무턱대고 자금회수에 나서는 금융권의
영업행태도 이제는 바뀔 때라는 지적이 높다.

D사의 자금담당 E이사는 최근 황당한 경험을 했다.

"F종금사에 1백억원의 대출을 요청했다 거절당해 몇군데 금융사를 더 방문
했습니다. 당장 D사가 1천억원대의 자금압박에 시달리고 있다는 소문이
돌더군요. 한군데서 1백억원씩 무조건 더해 버린 거지요"

E이사는 "금융기관마저 루머에 흔들리는게 아쉽게"며 "국내 기업의 재무
구조상 루머가 발생하지 않는 기업은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제는 기업과 금융권 등 모든 경제주체들이 악성루머의 차단의 발벗고
나서야 할 때라는 얘기다.

< 이영훈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5월 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