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산업의 범위는 무척 넓다.

자연상태에 있는 것을 화학적 반응을 이용해 새로운 제품으로 만들어내는
산업인 만큼 주위에 화학제품 아닌게 없다.

원유를 끓여 석유류 제품을 만들어내는 석유정제, 석유에서 나온 나프타를
분해해 합성수지와 합섬원료 합성고무를 만드는 석유화학 등에서부터 무기
화학, 시멘트, 섬유, 제약, 환경, 신소재, 페인트, 농약 등이 모두 화학산업
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화학업체라고 말할 때는 전문, 특수소재 등 화학중간재
제조업을 지칭한다.

특수용도의 합성수지, 비료 염료 안료 등 정밀화학제품, 기타 소다회 등
무기화학제품 등을 생산하는 업체들이다.

석유나 석유화학 시멘트 등이 산업의 "쌀"을 공급한다면 이들은 제조업에서
빼놓을 수 없는 "양념"을 만드는 역할을 한다.

"전문" "특수"의 꼬리표가 달린 만큼 화학업체 사장들의 개성도 이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대부분 "기술 지상주의자"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이들 업체가 생산하는 품목은 대부분 국내시장의 상당부분을
점하고 있는 독과점 품목들이다.

정부가 주도한 업종진입 제한과 보호조치 탓이기도 했지만 창사이래
대부분 2~3가지 폼목만 생산해오다 보니 기술수준도 상당히 높은 상태다.

수입되는 제품보다 가격이나 품질면에서 경쟁력을 갖추기만 하면 물건을
내다파는 데는 지장이 없었던 만큼 사장들은 영업보다는 기술과 가동률
생산성을 강조해왔다.

화학업체 사장들은 그래서 서울 본사보다는 공장에서 지낼 때가 더 많다.

스스로도 "나는 엔지니어일 뿐"이라고 강조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다른 어떤 업종의 사장들보다 최신 외국기술전문서적을 즐겨찾는게 바로
이들이다.

같은 이유로 웬만한 평사원들보다 인터넷 검색빈도수가 높은 사장들도
많은 편이다.

화학업체 사장들의 또 다른 특징은 한우물을 파온 사람들에게서 공통적
으로 나타나는 현상인 "자신감"이다.

실제로 대부분 업체들이 해당품목에서는 세계 어느나라 제품 못지 않은
경쟁력도 갖추고 있어 한단계만 도약하면 특정품목의 경우 국제 수준의
메이저를 꿈꿀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동양화학의 소다회 사업이다.

국내 시장 점유율이 안정적인데다 범용제품이 아니다 보니 국제시황에 별
영향을 받지 않는다.

화학회사들은 또 대부분의 업체들이 꾸준한 영업실적에 흑자장부를 갖고
있기도 하다.

뿐만 아니다.

NCC(나프타분해공장)에 비해 덩치가 작다보니 언제든지 발빠르게 변신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정유회사나 NCC업체들과 동시에 첨단화학 제품 개발경쟁을 벌이기 시작
해도 손해볼 것이 별로 없다.

화학업체 사장들은 이렇게 전문기술인으로서 자신감이 넘치다 보니 본의
아니게 "청기와 장수"라는 오해를 사기도 한다.

자기 것은 절대로 가르쳐주려 하지 않고 기술과 영업에 관한한 철저히
사내외 보안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비재를 생산하지 않는 만큼 대중매체와의 관계도 잦을 리 없다.

최근들어 이들 화학업체 사장이 고민에 빠졌다.

우수 인력 확보에 어려움이 부쩍 많아졌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대학에 다닐 때만 해도 확실한 취업이 보장되는 공과대학, 특히
그중에서도 화학공학과는 최고 인기학과였다.

그러나 요즘은 공대내에서도 수능시험 평균점수가 가장 낮은 곳이
화공과다.

화학에 대한 일반인식이 극도로 나빠진 탓이다.

원인은 많겠지만 무엇보다 화학이 환경오염의 주범으로 오인되고 있는
탓이다.

그나마 화학공학 전공자들도 화학업체에 입사하려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신소재나 에너지업체를 훨씬 선호하고 있다.

학생들이 스스로 화학을 "3D"업종으로 분류해버린 것이다.

게다가 그토록 중시해온 "기술"도 이제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돈주고 사려고 해도 미국과 일본 등이 기술을 팔지 않는다.

그렇다고 자체 개발하자니 그동안 연구개발(R&D)에 투자해놓은 게 너무
적다.

뿐만 아니다.

독과점체제가 깨지면서 영업과 서비스에도 신경을 더 써야 한다.

한마디로 현재로서는 수익성 높은 업체를 꾸려가고 있지만 어두운 미래
전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화학업체의 사장들인 셈이다.

최근들어 화학업체 사장들이 화학의 발전가능성을 강조하면서 뛰고 있는
것은 이런 저간의 사정이 있기 때문이다.

요사이 화학업체 사장들을 만나면 누구에게서든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다.

"화학강국이 세계강국입니다.

1,2차대전 때 독일이 그랬고 지금은 화학 1위인 미국이 세계 최강국입니다.

화학을 버리면 영원히 약소국으로 남습니다"(성재갑 LG화학부회장)

안팎의 견제를 기술과 추진력으로 이겨내고 있는 "신 부국강병론자"들이
바로 화학업체 사장들인 것이다.

< 권영설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5월 2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