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종 2년(1452) 3월29일에는 김종서가 "세종실록" 편찬방법에 관해 연대
순으로 사실기록을 해나가는 편년체로 기술하자는 의견을 제시한다.

"태종실록"은 강령과 제목을 세워 한 사안을 체계적으로 기술해나가는
강목체를 썼었지만 과거에 편년체를 많이 썼었고 사실기록을 빠짐없이 하는
데는 편년체가 적합하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이에 대해 문종은 사마광의 "자치통감"의 체제에 따라 편년을 원칙으로
하되 사실이 많아지면 요점을 추려서 강령을 세우는 절충법을 쓰도록 하라고
명령한다.

이어 김종서는 4월1일에 영의정 황보인과 함께 휘덕전에 나가서 소헌왕후
심씨의 존호를 추존해 올리고 4월 10일에는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신주를
문소전에 함께 모시는 부묘의식을 주관해 치러내는데 이 공로로 4월13일에
안장 갖춘 말 한필을 하사받는다.

그리고 5월2일에 정인지와 허후가 세종대에 예악의 기틀을 마련하였으므로
"세종실록"에 예악 부분만은 별도로 지를 만들어 싣자는 주장을 하자 김종서
는 이를 문종께 아뢰고 허락을 얻어낸다.

그래서 "세종실록"은 예지 악지 지리지 천문지 등을 말미에 싣는 특수체제
를 갖추게 된다.

그런데 문종은 본디 병약하게 태어나서 동궁시절부터 잔병이 떠나지
않았었고 세종 말년께에 서무를 대리하고 나서부터는 더욱 이를 이기지 못해
병마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러던중 모후인 소헌왕후의 상을 당하고 나서는 등에 부스럼이 생겨
고생하게 되는데 결국 이 등창 때문에 세종대왕이 다시 서무를 친결하다가
과로로 훙서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문종의 등창이 세종의 대상을 치르고 난 다음해인 문종2년 초여름부터
다시 재발하게 되어 5월3일에는 의정부와 육조에서 병환이 회복될 때까지
정무를 일절 정지하기를 청할 정도로 심해졌다.

결국 문종(1414~52)은 병환을 이기지 못하고 5월14일에 경복궁 천추전에서
39세를 일기로 돌아가고 만다.

이때 김종서와 황보인 남지 정분 허후 등 의정부 대신들과 정인지 신숙주
성삼문 등 집현전 학사들에게 부모없는 어린 왕세자의 보호를 부탁하는
고명을 내렸다고 한다.

김종서를 중심으로 한 의정부에서는 곧 이제 12세밖에 안된 어린 왕세자인
단종(1441~57)을 함원전으로 옮겨 모시고 나서 5월 18일에 근정문에서 즉위
하도록 한다.

이때 국왕은 교서를 내려 자신이 유충하여 국정을 친단하기 어려우므로
국사는 모두 의정부에 계문 시행하도록 하라고 하니 국사의 결재권은
황보인과 남지 김종서 등 삼정승에게 위임되는데, 좌의정 남지는 곧 풍증을
얻어 국사를 돌볼 수 없게 되어 사실상 황보인과 김종서가 국사를 재결하는
모든 권한을 행사하게 된다.

특히 어린 단종은 할아버지와 아버지 양왕의 절대 신임을 받고 이미 두
왕으로부터 군사 외교 및 문한의 책임을 전권 위임받고 있었던 김종서를
주석지신으로 철저히 믿고 있었으므로 김종서의 뜻이 곧 단종의 말이 될
정도였다.

이는 문종이 돌아가면서 당부하고 또 당부한 말을 실천하는 것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이에 대권탈취를 노리던 왕의 중숙인 수양대군 유(1417~68)의 눈에는
김종서가 눈에 가시같은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김종서는 수양대군의 이런 야심을 눈치채고 사람들이 종친가에
드나드는 것을 금지하는 종친가 분경의 금법을 엄히 세우는 한편 수양대군의
바로 한살 아래 아우로 이런 정치적 야망이 없는 풍류문예 왕자이던 안평대군
용(1418~53)을 내세워 내외로 이를 견제하자 수양대군의 분노는 극에
이르렀다.

그래서 수양대군이 뒷날 왕위를 빼앗고 나서 편찬해 낸 "단종실록"(원래는
"로산군 일기"였다) 권2 즉위년 6월30일 신묘조에는 김종서가 안평대군에게
보냈다는 오언율시가 실려 있고 이 시는 김종서가 안평대군으로 하여금
인심을 수습하여 모반하기를 독촉한 시라고 설명해 놓고 있다.

세조가 자신의 모반행위를 방지하려던 김종서와 안평대군에게 도리어
모반의 누명을 씌워 자신의 모반사실을 정당화시키려 한 곡필이다.

안평대군은 시문서화금기의 쌍삼절로 꼽히던 당대 제일의 문사이자
예술가로 세종대 문원을 주도했던 인물이니 문예는 물론 인물이나 덕망이
수양대군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출중하였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세종 부부의
사랑을 독차지했었고 형왕인 문종의 권우도 극진하였었다.

그래서 수양대군은 늘 안평대군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살아왔었는데 그런
안평이 자신의 야욕을 견제하게 되자 그 증오심이 지옥의 업화처럼 치솟아
올라서 장차 부정반역의 무리를 이끌고 충의열사들을 도륙하고 골육을
살해하는 일을 서슴없이 자행해나가며 대권을 탈취해가게 된다.

그러나 김종서는 수양대군의 그런 야심을 견제하기 위해 요로에 자신의
심복을 배치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니 10월1일 인사에서는 좌의정
남지를 영중추원사로 옮기고 정분을 좌찬성, 허후를 우참찬, 민신을
이조판서, 박팽년을 집현전 부제학에 임명하고 12월11일에는 궐석이 되었던
좌의정 자리에 자신이 올라가고 우의정에 정분을 올리며 허후를 좌참찬,
조극관을 병조판서로 해서 자파일색의 내각을 꾸며 놓는다.

그래서 김종서가 12월15일 공주 고향의 선산으로 성묘하러 내려갈 때
전별하는 인파가 서울 도성사람이 다 나온듯 하였다고 한다.

단종 원년(1453) 1월12일에 황보인이 풍덕으로 성묘를 떠날 때는 전별하는
인파가 이만 못하였는데 이는 김종서가 은수가 분명하여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꺼렸기 때문이었다고 수양대군 일파는 "단종실록"에 기록해 놓고 있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자청하여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후로 더욱 반역에
박차를 가하여 한명회(1415~87) 등 모사들과 더불어 김종서 일파의 동정을
염탐하고 그를 제거할 기회를 엿보게 된다.

그래서 3월21일에는 한명회가 그의 옛친구로 안평대군의 측근이 되어 있는
조번을 통해 안평대군과 김종서 일파의 동정을 탐색하고 3월22일에는
김종서의 문하생으로 패악하여 김종서의 눈밖에 나서 저들에게 포섭되어
있던 홍윤성(1425~75)을 충청도에서 돌아온 김종서에게 인사보내어 기밀을
탐지한다.

이렇게 수양대군의 반역행보가 급박하게 진행되고 있는데도 천생 귀공자로
태어나 풍류이외에 뜻이 없던 안평대군은 마포강변 절벽위에 담담정을 지어
놓고 여기서 기거하며 김승규를 비롯한 집현전 학사들과 풍류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이런 사실을 "단종실록" 권6 원년 4월27일 조에서는 안평대군이 모반을
밀의하기 위해 김승규 등과 밤을 틈타 내왕하며 매일 마포에서 자고다녔다고
기록해 놓고 있다.

6월23일 단종은 김종서가 70세가 되었다 하여 안석과 지팡이를 내려주는데
이때 국정을 맡고 있는 삼정승을 사람들이 일컫기를 "영의정 황보인은 나약
하고, 좌의정 김종서는 전횡하며, 우의정 정분은 눌려 있다"고 하였다.

정분은 김종서의 고향 후배로 김종서가 키워낸 사람이니 눌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수양대군이 김종서를 제거의 표적으로 삼게되었던 것은 당연하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김종서는 7월1일에 허후를 의정부 좌참찬겸 판이조사로
삼고 이징옥 김효성을 판중추원사, 박중림을 호조참판으로 하며 장자인
김승규를 지형조사, 황보석을 수사복시윤으로 삼아 조직적으로 수양대군의
반역을 차단하려 한다.

뒤이어 7월28일에 박중림을 대사헌으로 옮기는 것도 이런 차원의 인사이동
이었다.

10월2일 드디어 수양대군의 반역음모가 누설되고 삼정승은 이를 징치하려는
대책을 논의하게 되는데 이 사실이 수양대군측에 탐지되어 수양대군은 10월
10일 죽음을 각오하고 김종서를 몸소 제거하러 나선다.

이때 수양은 그의 모사인 권람(1416~65)과 한명회 홍달손(1415~72)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다.

"오늘 요망한 도적을 소탕하여 종사를 편안케 하겠으니 그대들은 마땅히
약속대로 하라.

내가 깊이 생각해보니 간당중에서 가장 간사하고 교활한 자는 김종서보다
더한 이가 없다.

제가 만약 먼저 알면 일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내가 한두 역사를 거느리고 바로 그 집으로 가서 선 자리에서 베고 달려와
아뢰면 나머지 도적은 평정할 것도 없다"

마침내 수양은 가동 임얼운으로 하여금 철퇴를 품고 따르게 하고 서대문
밖에 있던 김종서의 집으로 찾아가 김종서와 면대를 요청한다.

수양대군이 단신으로 직접 나서서 위해를 가할 줄은 꿈에도 모른채
방심하고 문밖으로 유인되어 나온 김종서는 가짜 편지를 달빛에 비춰
읽으려다가 수양의 지시를 박은 임얼운의 철퇴에 맞아 쓰러지니 이 광경을
곁에서 보고 있던 장자 승규는 몸으로 철퇴를 대신 받아 함께 쓰러진다.

이때 수양을 멀리서 뒤따라온 역사 양정이 칼을 뽑아 김승규를 쳐서
죽였다.

그리고 수양은 단종이 거처하는 시어소로 달려가 도승지 최항에게 김종서
부자의 처지를 알리고 임금을 위협하여 그 밤으로 김종서 일파를 불러들여
도륙하니 황보인 조극관 이양 윤처공 이명민 조번 민신 등이 이날 밤에 맞아
죽고 안평대군 부자는 거꾸로 반역의 주동자로 누명을 쓰고 강화도에
안치된다.

아아, 하늘이 어찌 이 반역의 무리들에게 기회를 주었더란 말인가.

김종서는 장자 승규가 대신 철퇴를 맞고 죽는 바람에 다시 소생하였었건만
임금께 달려가야 한다는 한가지 마음이 앞서 일단 피신하고 병력을 동원하여
저들을 처단해야 한다는 상식을 외면한채 단신 도성으로 달려 들어가려다
저들의 독수에 걸려 수양이 보낸 양정과 이흥상(?~1465)에게 죽음을 당한다.

상식밖의 불법 패륜으로 반역하는 무리들에게 끝까지 정법으로 맞서려
하다니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던가.

그러나 충의지사는 늘 그래왔었다.

그래서 충의열사로 역사속에 영원히 살아남게 되는 것이다.

김종서가 살해되자 안평대군도 10월18일에 강화도에서 사사되고 단종도
4년뒤인 세조 2년(1457) 10월24일에 영월에서 시해된다.

세종과 문종이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던 아드님들이었던가.

그래서 김종서에게 그 보호를 그렇게 간절하게 부탁했었던 것인데.

김종서는 그 부탁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생명과 일문일족의 생명을
내놓았고 또 뜻을 같이하던 많은 충의지사들과 그 가족의 생명을 희생시켰다.

그 결과 그와 그의 동지들은 영원히 충의열사로 역사속에 살아남아 만인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세종과 문종인들 어찌 지하에서 그 충의에 감격해 마지 않았겠는가.

(한국경제신문 1997년 5월 1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