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인수는 다른 날과 다름없이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지루하고 허망하기까지 한 월요일 오후다.

힘찬 노크소리와 함께 간호사가 우편물을 들고 진료실안으로 성큼
들어온다.

그녀의 표정이 어느 때보다도 밝다.

"박사님, 지영웅의 편지가 있어요. 외국에서 왔는데요"

발신지는 페루 리마에서였다.

페루라? 공박사는 아이러니컬해지며 웃는다.

그녀는 무척 반가웠지만 내색을 안하고, "오늘은 좀 지루한 날이군.
봄이라서 그런가, 나른하구 이상하잖아?"

"박사님 기분이 그러신가 봐요. 저는 안 그런데요. 지영웅이란 환자
안 나타난다 했더니 외유중이었군요"

그러면서 공연히 쿡쿡 웃는다.

약간의 비웃음을 섞어서, "박사님같이 단단한 바위에 계란을 던지더니
말짱 헛거라는 것을 알았나 보죠"

그녀는 돌아서 나가면서 또 쿡쿡 웃는다.

그의 편지가 아무튼 그녀들에게 청량제가 된 것은 확실하다.

페루까지 찾아가서 무엇을 하고 있나? 공박사는 간호사가 나가자
지영웅의 편지부터 북 뜯는다.

무슨 개같은 소리를 했는가? 앵무새같은 소식인가? 우선 궁금하다.

시인처럼 새들처럼 그곳에서 죽겠다는 것인가? 페루에서?

< 공박사님 귀하. 저는 지금 세계 여행그룹투어에 참가해서 남미의
페루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어제는 쿠즈코와 마주피추를 거쳐서 지금은 다시 리마에 와 있습니다.

저 말고는 모두 아줌마와 아저씨들인데요.

덕택에 저는 많은 사랑을 받고 여행하고 있습니다.

신사의 매너로 대하니 제가 좋은 집안에서 자란 귀공자인줄 알고 모두
아주 인간적이고 호의적입니다.

이제 박사님만 저의 비밀을 알지 아무도 저의 신분을 모르니 오히려
무안합니다.

이제 열흘후에 브라질여행을 끝내면 저는 서울로 돌아갑니다.

여전히 가끔 두통은 나지만 마음의 병은 감쪽같이 나은 것도 같습니다.

또 어느 숙녀를 많이 존경하고 따르게 되어서 정신적으로 안정되니까
칼로 쿡쿡 찔리는 것 같은 편두통은 많이 없어진 것 같아요.

그러나 박사님에게는 가끔 가려고 해요.

그것은 스승을 찾아가는 것 같은 존경심이지요.

저도 빨리 결혼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20년이나 연상인 여자하고는 안 되겠지요? 모든 조건이 저에게
어울리는데 나이가 안 어울리는군요.

그것이 제가 다시 박사님에게 조언을 받고 싶은 부분입니다.

그럼 제가 박사님의 선물을 무엇으로 살까 고민하다가 산 잉카시대의
물병 모조품을 기쁘게 받아주시리라 믿으며 이만 줄입니다.

머나먼 리마에서 지영웅 드림 >

공박사는 그 연상의 여자가 김영신은 아닐 것을 하느님께 빌면서 편지를
봉투속에 집어넣는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5월 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