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도중 머리를 식히기 위해 공박사는 창밖으로 시선을 보내고 있다.

정신신경과를 찾는 환자들 중에는 의외로 여성들이 많다.

가끔 그녀는 남자들에게 두들겨맞고 정신이상이 될 정도로 신경쇠약이
되고 폭력의 공포로 병든 여자들이 찾아올때 어떻게 하면 여자들이
남자들에게 두들겨맞는 공포에서 놓여날 수 있는 세상이 올 수 있는가를
심각하게 생각하곤 한다.

더구나 며칠전에는 새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어느 남자 의원의 어부인이
외국유학까지 하고 와서 쓴 글에서 자기 남편의 발을 마사지해주고
씻겨준다는 수필을 발표한 것을 읽으면서 여성 헬스클럽 안에서 대소동이
일어났었다.

"다음 번에는 안 찍어줄거야"

"우리가 남자들의 노예적 위치에서 겨우 벗어나고 있는데 이 여자가
이 무슨 망발이야?"

"타임머신을 타고 이조말엽으로 돌아간 이런 여자의 남편에게 다시는
국회로 가는 길을 내줄 수 없다"고 기염을 토했다.

나이가 어린 여자라서 자기의 내조로 남편을 국회의원까지 당선시켜서
우쭐해진 것은 좋은데, 남편의 발을 씻긴다는 그런 굴욕적인 현처 역할을
자랑스레 썼다니 이 아니 멍청스럽고 여성들을 모욕하는 글이 아닌가?

강남 여자들은 정말 대단히 높은 수준의 여성해방주의자들이다.

물질적으로 어느 정도 풍요로운 시대에 교육을 받은 많은 여자들이
아파트촌을 중심으로 활기등등하게 살아가고 있다.

압구정동으로 대변되는 강남 속칭 20년전의 말죽거리는 여러 의미에서
자본주의 중산층의 대표적인 앙팡테리블들의 섬이다.

압구정동을 가리켜 시인들은 "장미의 섬"이라 노래하고, 울분에 끓는
사회부기자들은 타락한 소돔과 고모라라고 윽박지른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 "장미의 섬"에는 종류를 세거나 이름을 붙이기
난감한 부류의 많은 인간들이 들끓으며 기염을 토하고, 망하고 흥하며,
1년 365일 기승을 부린다.

말도 많고 탈도 많다.

거기는 의처증 환자인 황기백이도 살고, 남편의 늦바람에 알콜중독자로
전락할 수 있는 박춘희 여사도 살고, 여러 중독증상에 시달리고 있는
콜보이 지영웅도 살고, 고상한 공박사도 살고, 콜보이 조직망의
센터포워드인 소대가리 소우진 사장도, 최고의 지와 미를 갖추었으면서도
딸 때문에 불행한 우미연 여사도 산다.

우여사는 우선 남편이 갑자기 외국 대사들과의 파티에 장관을 대신해서
참석하게 되어 늦게 됐다는 전화를 받고 궁전을 향해 집을 떠난다.

제인이 가지고 있던 성냥갑에서 궁전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발견하고
제인을 유혹해내는 못된 룸살롱이 궁전임을 알아내어 수첩에 적어가지고
있던 우여사는 큰 마음먹고 제인을 만나기 위해 그곳으로 간다.

전화로 알아보니 무척 가까워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궁전은 있다.

바로 주택가 옆에 이런 할렘이나 그리니치 빌리디같은 악의 소굴들이
버젓이 존재하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 우여사는 너무도 그 환락가가
아파트단지와 가까움에 경악한다.

그리고 한국이, 아니 서울이 먼 딴 나라처럼 낯설고 무시무시하게
느껴진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3월 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