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신만고 끝에 중국을 빠져나가 필리핀에 머물고 있는 황장엽
전 북한노동당비서가 서울에 들어오는 것은 이변이 없는 한 시간문제다.

지난 한달여의 열띤 반응으로 미루어 그가 망명목적지인 한국땅을
밟는 순간 일대 법석이 벌어지리란 상상은 어렵지 않다.

근년 북한인들의 귀순이 빈번해진 탓에 국민들의 호기심이 희석된
측면도 없진 않으나 황씨가 그 신분의 비범성으로 얼만큼 관심의
초점이 됨은 나무랄수 없는 일이다.

당비서, 김일성대학 총장, 김정일의 은사라는 경력만으로도 각광을
받기 충분하다.

그러나 결정적인 요건은 바로 김일성주체사상의 안출-선전 장본인의
전향이라는 두터운 상징성이다.

그것으로 국내만 아닌 세계 매체들이 무게있게 기사를 좇는 충분한
이유가 되며 단순한 흥미거리 이상이다.

여러 경로를 통해 들려오는 북한 식량사정의 절박성은 분초를 다투는듯
더해가고 있고 그에 수반된 정치 사회적 상황이 일촉즉발의 극점을 지향하는
마당에 황씨 입국이 가져오는 의미는 상징성 외에 실용성 또한 절하할수
없다.

그리고 바로 이점이 유의점이다.

매체들이 국민의 알 권리를 앞세운 나머지 추측-과장보도 경쟁에 휘말려
결과적으로 사태의 본질을 그르쳐서 안됨은 말할나위 없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정부 유관기관 내지 정치권의 행태다.

너도나도 들떠 우왕좌왕하지 않게 하려면, 가령 통일원 주도하에 신중한
사전계획을 협조 수립하는 일은 너무 당연하다.

나아가 무엇보다 우려스런 것은 근시안적으로 황씨의 존재를 정당-정파간
파워게임에 이용한다거나 북한 몰아붙이기에 섣불리 동원하는 미숙성이다.

황씨의 전향이야 말로 가장 높은 차원에서 길게 통일목표에 이바지돼야
한다.

현하 북한의 실정, 특히 김일성 사망-연속수해 이후 급전직하하고 있는
구석구석의 동향을 심층분석 종합평가하여 대비하는 작업에서 황씨의 조언은
가히 천재일우다.

북한이 당면한 현실은 식량난이 얼만큼 숨을 돌린다 해서 쉽사리 복구되기
어려운 방향으로 치닫고 있는 것 같다.

몇달후 주석직 승계가 점쳐지는 김정일의 권력기반은 상상보다 취약,
의지처는 군부가 고작이라는 단서가 늘고 있다.

최광 김광진의 잇단 사망으로 군부의 동요 가능성은 어느때보다 크게
비친다.

중앙당의 무능을 질타하며 군을 독려, 의탁하려는 김정일의 기대에
군량미 위협을 느끼는 군이 과연 얼마나 오래 부응할지도 의문이다.

황씨의 조기 입국을 바랄수록 당국은 최후까지 안심을 해선 안된다.

한보사태 현철파동으로 영일이 없는 사이 경제사정은 악화일로를
치달으며 그에 아랑곳 없이 정치는 온통 대권 세몰이에 여념이 없다.

그럴수록 통일-외교-안보 팀은 공을 다투지 말고 흔들림없이 황씨의
안전입국, 그뒤의 처변에 빈틈없이 대비하길 바란다.

너무 큰 기대는 금물이지만 최소한의 수확은 기대할만 하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3월 2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