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노동당 황장엽비서의 망명요청이 있은지 10여일 지났다.

아직 뚜렷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고 있지만 그의 망명요청 자체가
김정일과 그의 친위세력은 물론 북한사회의 민족간부로 불리는
인텔리겐치아 층에 대해 심각한 타격을 준 것으로 보인다.

황장엽은 김정일집단의 단순한 요인이 아니라 통치이념(주체사상)을
체계화하고 김정일 후계체제를 이념정책으로 뒷받침해온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공산정권, 특히 레닌주의를 신봉하는 북한노동당정권은 먼저 이념의
틀을 만들어 놓고 이론이 제시하는 바에 따라 전략과 행동을 전개하는
권력이다.

따라서 황비서처럼 통치이념을 직접 체계화하고 다년간에 걸쳐 당비서로서
이념정책을 담당했던 장본인인 그가 평양을 버리고 서울을 택했다는 것은
김정일체제에 치명적 타격이 아닐수 없다.

북한사회에는 민족간부로 칭하는 약 1백70만명의 인텔리겐치아 층이 있다.

이들이 북한사회의 실질적 주인이다.

핵무기등 근대적 군사과학을 배운 소장파 인민군 장교집단을 비롯해
주민사회를 지배하는 중견 당원들, 국가경영의 행정관료들과 산업경제
기관의 관리요원들, 교육문화 및 과학기술요원들, 사회단체관리요원 등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황비서의 한국행 망명요청에 대해 분노보다도 자못 당황했을
것이다.

어떻게 주체사상의 대부가 평양을 버리고 서울로 가겠다는 것인가.

그는 누구보다도 김정일체제의 운명에 대해 잘 알고 있을 사람이다.

서울에 가서 자신의 주체사상을 실현해 보겠다는 꿈의 도피가 아닌 이상,
그의 망명요청은 김정일 체제의 종말을 고하는 파산선언이나 다름없다.

북한의 인텔리겐치아 층은 겉으로는 입을 모아 격렬히 황비서를 성토하고
있다.

그러나 내적으로는 황비서의 탈북행위를 자신들의 운명과 결부시켜 고민에
빠져있을 것으로 보인다.

황비서의 망명요청이 북한의 민중사회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

북한사회의 인구 구조는 55세 미만이 80%를 웃돌고 있다.

이들은 공산당의 사상교육을 통해서만 자본주의가 악이고 지주가 나쁘다는
것을 알고 있을뿐 실제로 생활경험을 통해서는 아는바가 없다.

또 그들은 자본주의적 문명이 뿌리를 내린 자유사회의 인민과는 다르다.

서구사회의 피플과는 다르다는 얘기다.

이들은 개인의 자유와 인권에 대해, 또는 의무와 권리에 대해 법의식이
뚜렷한 사람들이 못된다.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순치된 생활에 익숙한 무인권 무권리의
기계인간이나 다름없다.

소위 문화적 노예들인 셈이다.

이들에게는 당장 황비서의 북한탈출 사실이 알려지지 않겠지만 언젠가
그 사실이 전해질 것이다.

그들은 한마디로 "잘했다"고 마음속으로 박수를 보낼지 모른다.

경제난, 특히 기아상태의 식량난으로 북한에서의 이승생활을 저주하는
그들의 염세주의는 황비서의 탈북행위를 차라리 자기네의 심정과 통한다는
동정으로 받아들일지 모른다.

왜 그런가.

55세미만의 북한사람들은 6.25남침전쟁에 대해서도 모르기는 우리사회의
전후세대나 마찬가지다.

교육상으로만 대한민국을 적대시하도록 순치되어 있는 그들이지만
그들에게도 회의는 있다.

공산주의 국가이기는 마찬가지지만 중국은 그렇지 않은데 왜 우리만
이래야 하는가의 회의를 갖게되는 것은 당연하다.

김정일체제의 희생물이라는 피해의식을 품게 되는 것도 당연하다.

통치이념의 파산에 뒤따르는 것은 체제붕괴다.

김정일과 그의 친위세력은 결코 다수파가 아니다.

북한은 소수가 다수를 압도하는 괴리에 의해 체제유지를 해오고 있다.

황비서 탈북후 김정일체제가 종래의 통치방식을 지양하고 인민에게
많은 양보를 하면서 권력을 유지하는 방식을 채택할 것으로는 기대할 것이
못된다.

오히려 초강경 노선으로 광분하면서 힘을 과시하는 행동단계로 들어갈
가능성이 크다.

예컨대 북한에서는 제2의 황장엽을 색출하라는 강압정책과 동시에
주민통제를 강화하게 될 것이다.

대남정책에서는 테러리즘에 의한 남한사회의 무정부상태를 음모할지
모른다.

북한에서 체제붕괴의 위기에 직면하기 전에 남한 사회에 테러리즘에
의한 혼란상태를 도모하는 소위 행동의 단계로 들어갈 가능성이 큰 것이다.

남한사회에 둥지를 틀고 숨어 있는 고정간첩은 그 숫자가 이미 수만에
이르고 있다고 항간의 화제가 된지 오래다.

김정일체제의 붕괴 위기가 전면화되기 전에 남한 사회에 사멸적 위협을
가하려는 음모의 과학과 파괴의 기술은 탈북자 이한영씨에 대한 피격으로
행동의 신호탄을 올렸다.

이 신호탄은 바로 배신자는 이렇게 죽는다는 표본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한국사회는 지금 내장질환이 우려할 상태에 이르고 있다.

춘3월과 꽃피는 4월이 되면 계절풍처럼 찾아오는 학원사태와 생산
현장에서의 노사분규 등으로 한바탕 태풍지대로 화하기 시작한다.

더구나 금년은 대선을 치러야 하기 때문에 민심은 정치바람을 타고
출렁거리게 된다.

김정일이 이 상황을 그대로 방관만 하고 있을리 만무하다.

북한이 남한사회를 교란하고 파괴하는 것을 자기체제의 상대적 안정을
위한 최고가치의 투쟁형태로 규정하여 지령을 내리게 되면 지하의 고첩망과
밀파 공작원등은 틀림없이 행동하는 "혁명가"로 될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2월 2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