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병태의원(62)은 중국대사로 재직당시 한보철강의 중국 천진공단 진출
사업을 중개하고 국회 상임위활동에서 한보에 대한 특혜의혹에 대한 의원들
의 추궁을 무마해 주는 대가로 역시 거액의 뇌물을 받은 혐의가 포착됐다.

정재철의원이 국정감사등 국회상임위활동과정에서 터져 나올수 있는 야권
의원의 입막음을 막기 위해 선택됐다면 황의원은 이를 보조하기 위한 안전
장치였던 셈이다.

황병태의원은 관계 학계 정계를 두루 거친 민주계 재선의원으로 국회
재정경제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서울대상대출신으로 고시 외교과에 합격, 외무부 상공부 경제기획원을 두루
거쳤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의 총애를 받아 37세때 경제기획원 차관보를 맡을
정도로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관료생활을 그만둔 그는 지난 79년 미버클리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후에는 외국어대교수와 총장을 역임했다.

총장 재직시인 지난 87년 대통령선거 직전 "YS캠프"에 합류, 정계에
입문했다.

88년 4.26선거때 서울강남갑에서 금배지를 단 황의원은 통일민주당의
부총재 정책위의장등을 지내면서 해박한 이론과 뛰어난 언변등으로 총재인
YS의 최측근 인물로 급부상, "좌병태 우병태"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는 5공청산과정을 거치면서 "집권을 위해서는 보수대연합이 필요하다"는
점을 YS에게 각인시킴으로써 사실상 3당 합당의 산파역을 해냈다.

14대때 지역구에서 낙선한 그는 문민정부 출범후 주중대사에 임명돼
한.중관계 증진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95년말 총선출마를 위해
스스로 대사직을 사퇴하는 과정에서 여권핵심부로부터 빈축을 사기도 했다.

96년 15대총선에서 지역구를 경북 문경.예천으로 옮겨 원내에 진출한
황의원은 일반의 예상을 깨고 재경위원장에 발탁돼 통치권자의 신임을
회복하는데 성공했다.

황의원은 평소 주변으로부터 "비상한 두뇌회전과 뛰어난 감각을 갖춘
인물"이라는 평을 받아 왔으며 특히 기억력이 뛰어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자가 발전"이 다소 심하고 말이 헤프다"는 비난도 종종 들어왔다.

한마디로 "재승박덕" 형이라는 지적을 많이 받아온 인물이다.

< 김선태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2월 1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