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우촌은 공공도인이 건네주고 간 두루마리를 세세히 읽어보고
그 두루마리가 바로 가보옥을 중심한 가씨 가문에 관한 기록임을 알고는
크게 놀랐다.

그리고 가우촌 자기의 행적도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가우촌은 두루마리에 적힌 글을 기초로 세상 사람들이 재미있게 읽도록
이야기를 덧붙인다면 세세토록 남을 불후의 작품이 나올 수도 있겠다 싶어,
자신의 글 재주를 살려 여러 모로 애를 써보았으나 결국 역부족임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당대에 이 작업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란 말인가.

가우촌은 천하를 유람하면서 그 작업을 할 수 있는 문필가를 두루
찾아보았으나 워낙 방대하고 정교한 작업이라 마땅한 사람을 만나기가
힘들었다.

그러다가 북경 서교의 어느 주막에서 술값 대신 그림을 주모에게
그려주고 있는 빈한한 한 선비를 만나 두루마리를 보여주니, 그 선비는
자신의 일생 일대의 과업을 이제야 발견했다면서 손으로 무릎을 치며
감격해 하였다.

그러면서 앉은 자리에서 붓과 종이를 꺼내더니 이야기의 서두를 적어
내려가는데, 그야말로 일필휘지요 천의무봉이었다.

이만한 인물을 다시 만나기는 백년이 지나도 쉽지 않을 것이라 여겨진
가우촌은 흔쾌히 두루마리를 그 선비에게 던져주고 주막을 나섰다.

선비가 따라나오면서 가우촌에게 물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며 어디로 가는 길이오?"

"그 두루마리를 자세히 살펴보면 한구석에 내 이름도 나올 것이오.
나는 부귀 영화를 얼마큼 누려보기도 하였는데, 그 모든 게 덧없음을
깨닫고 지금은 구름따라 강물따라 흘러갈 뿐이요.

인생은 몽중몽몽이오. 꿈속에서 또 꿈을 꾸는 것과 같단 말이오"

"선생이 나에게 나타나 이두루마리를 준 것도 꿈속의 꿈 아니오?"

"그럴지도 모르지오. 아무튼 두루마리에 적힌 이야기를 세상 사람들이
재미있게 읽고 감동을 느끼도록 잘 써보시오.

그러면 당신의 문명이 계명성처럼 영원히 빛날 것이오. 그런데 선생의
이름이나 알고 갑시다"

"선생도 이름을 알려주지 않느나데 나만 알려줄수 있나요?"

"허허. 내 이름은 가우촌이오"

"가어촌요? 그럼 나에게 가짜 이야기가 적힌 두루마리를 줬단 말이오?"

"가어촌이 아니가 가우촌이오. 말이 나온 김에 하나 더 말하겠는데,
진짜 이야기를 가짜처럼, 가짜 이야기를 진짜처럼 써야 세상에 널리 읽히는
책을 쓸 수 있을 것이오. 이제 선생의 이름을 말해주시오"

"내 이름은 조설근이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2월 3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