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옥과 가란이 과거에 급제를 하였다는 통보가 내려왔으나 보옥은 영영
나타나지 않았다.

가정은 저녁 눈발 속에서 사라진 그 사람이 보옥임에 틀림없다고
여기면서도 보옥이 어디서 급제 소식을 듣고 집으로 돌아오지는 않나 하고
초조하게 기다렸다.

과거 급제자들이 황제를 알현하는 날, 황제는 가란을 만나 귀비 원춘의
친정이기도 한 가씨 가문의 형편에 대해 이것 저것 물어보고는 몇가지
은택을 베풀었다.

그중에 옥에 갇혀 있는 설반에 대한 사면도 포함되어 있었다.

설반은 속죄금을 내고 풀려나 그동안 시녀 내지는 애첩으로 머물고 있던
진사은의 딸 향릉을 정실 아내로 맞아들였다.

옛날에 진사은으로부터 은혜를 입은 적이 있는 가우촌은 벼슬 자리를
옮겨 다니며 출세와 영달을 꿈꾸다가 뇌물을 받아먹은 죄가 탄로나 그만
관복을 벗게 되었다.

가우촌은 식구들을 고향으로 내려보내놓고 나서 단신으로 천하 유람길에
올랐다.

급류진 각미도라는 나루터에 이르렀을때 허름한 초막에서 도인 한
사람이 나오더니 가우촌의 손을 잡으며 영접하였다.

가우촌이 보니 그 도인은 진사은 선생이 아닌가.

가우촌이 너무 반가워 그동안 지내온 이야기들을 나누는 중에 진사은의
딸 향릉이 가씨 가문과 친척지간인 설씨 가문의 며느리가 된 소식을
전하였다.

그러자 진사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희미한 웃음을 흘리기만 했다.

"어릴적에 행방불명이 되어 그토록 찾아 헤매던 딸이 살아서 어엿한
가문의 마님이 되었다고 하는데 선생은 기쁘지 않습니까?"

"난 이 세상 사람도 아니요, 저 세상 사람도 아니오"

진사은은 애매한 말을 흘릴뿐 딸에 대해 더이상 묻지 않았다.

가우촌은 지금 자기가 선인(선인)이랑 이야기를 나누고 있음을 새삼
깨닫고 화제를 다른 데로 돌렸다.

"보옥이라고 아시는지요? 가씨 가문에서 통령보옥을 입에 물고
태어났다 하여 어떤 인물이 될 것인가 모두들 주목을 하였는데 글쎄
이번에 과거에 일곱번째로 급제를 하고는 행방이 묘연해졌다고 하지
않습니까.

선생은 혹시 보옥이 어디로 갔는지 아시는지요?"

"보옥이라는 인물을 세상에서 한번도 만난 적은 없지만 선계에서는 이미
잘 알려져 있어 마치 오래된 벗처럼 여겨지기도 하지요.

보옥은 이전에 망망대사와 묘묘진인에게 이끌려 하계에 내려왔는데
이제 세상 인연이 다 차서 다시 그 두사람에게 이끌려 원래 있던 청경봉
아래로 돌아갔지요"

(한국경제신문 1996년 12월 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