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의 관료조직은 문반과 무반의 양반체계로 이루어졌고 상하계급이
엄격했다.

관리의 등급은 "품" 또는 "유품"이라 해서 "정" "종" 각 9품으로 구분돼
정1품에서 종9품까지 18품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계는 무려 30개에 이른다.

내직이라고 불렸던 중앙정부에만도 700여개의 공무원직이 있었다.

따라서 옛 사람들은 인재를 골라쓰는 방법에 심혈을 기울여 왕이라도
전횡할수 없는 제도를 확립해 놓았다.

조선왕조에서는 관리임용제도와 인사행정을 일컬어 "도목정사"라고
했다.

해마다 6월과 12월 두번에 걸쳐 시행하는 것이 관례였다.

이조와 병조의 고급관리들로 구성된 전형위원회에서 관리의 명부나
근무성적표를 토대로 적격자 3명을 선발한뒤 왕에게 일람표를 만들어
올리면 왕이 최종적으로 한명을 낙점하고 이를 관보인 "조보"에 공표한다.

그렇다고 지금처럼 곧바로 관직에 취임하는 것은 아니다.

그 직후 이조와 병조에서 해당자의 친족 외족 처족등 3족의 부 조 증조
외조의 명단을 사헌부와 사간원에 보내 결격사유의 유무를 판정받아야
했다.

이런 절차를 "서경"이라 했는데 서경을 통과한 사람이어야만 전조에서
취임을 승인하는 직첩을 발행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 "서경"에 걸려 고위직에 나가지 못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수없이 많이 기록돼 있다.

조상들의 잘못 보다는 자신의 탐학이나 음욕이 문제가 된 것이 더 많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뇌물로 들깨 한섬, 쌀 두말닷되를 받았던 것이 화근이 됐던 인물도
있다.

현군으로 이름난 성종도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최호원을 당상관인
병조참지에 기용했다가 관직을 다시 거두는 수모를 감내해야 했다.

"서경"결과 그가 대구부사를 지낼때 자기땅에 물길을 대기 위해 백성의
땅을 침범해 지탄을 받은 일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최근 여당의 대표가 잇따르는 고위공직자의 비리사건을 계기로 정부
인사제도의 개혁방안을 마련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정말 이제는 더 이상 고위공직자의 인사가 허술하게 이루어져 국민들을
다시 실망시켜서는 안될 시점이다.

"의리는 줄지어 나는 기러기와 같고, 차례는 꼬치에 꿴 물고기와 같으니
어찌 전형이라고 말할수 있겠는가"

철저한 검증도 없이 자파의 인물만을 조정에 끌어들이는 인사를 비꼰
위나라 설숙의 말이 생각난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1월 1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