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15일자) 이 갈증에 약은 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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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제 기어코 살아 있는 전직 대통령 3인을 동시에 재판정에
세웠다.
동서고금에 다시 없을 하나의 사건을 겪고난 국민들의 갈증, 허탈감을
뭘로 달래야 시원할까.
황량하단 말 말고는 다른 어떤 어휘도 찾기 힘든 심정이다.
구인명령에 응해 출정까지 했으면서 끝내 증언을 거부한 최규하씨의
옹고집, 또는 남모를 깊은 속내에 포폄은 있을수 있다.
가령 소신을 가지고 증언을 계속 거부한 이상, 강제 구인을 당했다
해서 굽힌다면 되느냐고 두둔하는 반응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재판부의 구인결정 이유처럼 역사를 바로 잡는 일(증언)에
전직 대통령이라고 예외를 인정해선 안되며 더욱 출정을 한 바에야
최소한 "그 사건은 혁명으로 볼수 없다"는 며칠전 전언의 진위 여부라도
밝혔어야 옳았다는 비난의 소리도 거세게 들린다.
그럼에도 불구, 세 전직 대통령의 동시 출정 자체를 평상한 마음으로
치부하기엔 역시 너무 황량하다.
나라 안만이 아니다.
전-노 두 사람이 출정, 손을 맞잡는 장면을 되풀이 방영했던 CNN을 비롯해
세계 거의 모든 매체들은 최씨의 구인 장면을 흥미거리로 다루었다.
전-노씨의 요청으로 모면했지만 만일 3인이 함께 찍힌 정내 사진이
있었다면 난리가 났으리라.
그러나 문제의 본질은 그런 매스컴 과열경쟁에 있지 않고 그것이 인간의
경이를 자극하는데 있다.
하나하나 들출 것도 없다.
왕이든 대통령이든 도대체 살아 있는 전직 국가원수 몇이 몽땅
한 재판정에 한날한시 끌려나와 재판받은 일이 동서역사 어디 또
있었느냐는 한가지 물음으로 족하다.
그 바탕엔 유일무이 최고 권좌란 국가 원수직의 특성, 그에 따르는
위엄 영예 선망이 깔려 있다.
정치후진국이 항용 범하는 결정적 오류는 대통령직을 바로 그런 양의
측면에서 바라보는 단견에 기인한다.
또 그렇게 보는 한 어제 서울고법에 쏠린 관심은 탈도덕적인 한낱
흥미거리 수준을 넘지 못하며 아무런 교훈도 없다.
실로 이번에 국민 한사람 한사람이 아쉬움을 달래지 못하는 것은
헌법상 대통령의 그런 권력과 영예가 아니라 법외의 무한한 도덕적
의무를 주목하는 때문이다.
대통령은 막대한 권력-명예에 상응한 수범의 책임을 진다는 사실을
국민은 꿰뚫어 보는 것이다.
전직 대통령 둘로도 모자라 세사람씩을 법정에 세우는 것이 세계의
찬탄 대상이기 보다 수치거리임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인내하는 이유는
전화위복의 희망 때문이다.
이런 쓰라림을 견뎌냄으로써 권력남용,권력빙자 축재와 부패가 다시는
없도록 경계하자는 것이 이심전심 아닌가.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대통령의 엄벌 한마디에 당국이 눈을 부릅뜨기
무섭게 부패 안한 데란 찾아볼수 없다.
썩은 데를 찾아 청소하기는 글렀고 썩지 않은 곳을 찾아 방부제를 치는
길밖엔 없다는 절박감이 죄어 온다.
외무장관 사임은 그렇다 쳐도 국방장관, 복지부장관, 시내버스 등등
끝을 모르게 나오는 저 쓰레기행진에 넌덜이 날 지경이다.
그러나 지겹다고 외면하면 큰일.
그때그때 쓸어내야만 기둥이라도 보전한다.
백죄백벌 뿐이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1월 15일자).
세웠다.
동서고금에 다시 없을 하나의 사건을 겪고난 국민들의 갈증, 허탈감을
뭘로 달래야 시원할까.
황량하단 말 말고는 다른 어떤 어휘도 찾기 힘든 심정이다.
구인명령에 응해 출정까지 했으면서 끝내 증언을 거부한 최규하씨의
옹고집, 또는 남모를 깊은 속내에 포폄은 있을수 있다.
가령 소신을 가지고 증언을 계속 거부한 이상, 강제 구인을 당했다
해서 굽힌다면 되느냐고 두둔하는 반응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재판부의 구인결정 이유처럼 역사를 바로 잡는 일(증언)에
전직 대통령이라고 예외를 인정해선 안되며 더욱 출정을 한 바에야
최소한 "그 사건은 혁명으로 볼수 없다"는 며칠전 전언의 진위 여부라도
밝혔어야 옳았다는 비난의 소리도 거세게 들린다.
그럼에도 불구, 세 전직 대통령의 동시 출정 자체를 평상한 마음으로
치부하기엔 역시 너무 황량하다.
나라 안만이 아니다.
전-노 두 사람이 출정, 손을 맞잡는 장면을 되풀이 방영했던 CNN을 비롯해
세계 거의 모든 매체들은 최씨의 구인 장면을 흥미거리로 다루었다.
전-노씨의 요청으로 모면했지만 만일 3인이 함께 찍힌 정내 사진이
있었다면 난리가 났으리라.
그러나 문제의 본질은 그런 매스컴 과열경쟁에 있지 않고 그것이 인간의
경이를 자극하는데 있다.
하나하나 들출 것도 없다.
왕이든 대통령이든 도대체 살아 있는 전직 국가원수 몇이 몽땅
한 재판정에 한날한시 끌려나와 재판받은 일이 동서역사 어디 또
있었느냐는 한가지 물음으로 족하다.
그 바탕엔 유일무이 최고 권좌란 국가 원수직의 특성, 그에 따르는
위엄 영예 선망이 깔려 있다.
정치후진국이 항용 범하는 결정적 오류는 대통령직을 바로 그런 양의
측면에서 바라보는 단견에 기인한다.
또 그렇게 보는 한 어제 서울고법에 쏠린 관심은 탈도덕적인 한낱
흥미거리 수준을 넘지 못하며 아무런 교훈도 없다.
실로 이번에 국민 한사람 한사람이 아쉬움을 달래지 못하는 것은
헌법상 대통령의 그런 권력과 영예가 아니라 법외의 무한한 도덕적
의무를 주목하는 때문이다.
대통령은 막대한 권력-명예에 상응한 수범의 책임을 진다는 사실을
국민은 꿰뚫어 보는 것이다.
전직 대통령 둘로도 모자라 세사람씩을 법정에 세우는 것이 세계의
찬탄 대상이기 보다 수치거리임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인내하는 이유는
전화위복의 희망 때문이다.
이런 쓰라림을 견뎌냄으로써 권력남용,권력빙자 축재와 부패가 다시는
없도록 경계하자는 것이 이심전심 아닌가.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대통령의 엄벌 한마디에 당국이 눈을 부릅뜨기
무섭게 부패 안한 데란 찾아볼수 없다.
썩은 데를 찾아 청소하기는 글렀고 썩지 않은 곳을 찾아 방부제를 치는
길밖엔 없다는 절박감이 죄어 온다.
외무장관 사임은 그렇다 쳐도 국방장관, 복지부장관, 시내버스 등등
끝을 모르게 나오는 저 쓰레기행진에 넌덜이 날 지경이다.
그러나 지겹다고 외면하면 큰일.
그때그때 쓸어내야만 기둥이라도 보전한다.
백죄백벌 뿐이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1월 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