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한담] "그림은 도의 세계 논리 배제해야" .. 정창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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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란 무엇인가" "어떤 것이 좋은 그림인가".
서양화단의 원로 정창섭화백(69)은 이같은 물음에 대해 "잘 모르겠다"고
답한다.
50년이상 화판을 붙들어 왔지만 아직까지 그림은 어때야 한다는데 대한
정답을 찾지 못했다는 고백이다.
단지 이제쯤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느껴지는 정도라고 털어
놓는다.
미술계에도 어김없이 불어닥친 세계화바람과 함께 국적불명의 온갖 그림이
난무하는 가운데 우리종이인 닥지를 이용, 한국의 자연과 정신 나아가
태초의 자연과 인간의 모습을 찾아가는 정화백을 서울방배동 화실에서
만났다.
정화백은 충북청주에서 태어나 서울대회화과를 졸업했다(1회).
1950년 5월 "서울대미대졸업전"에서 "산나물"로 총장상을 받았고 53년과
55년 국전에서 특선을 차지했다.
국전 추천작가및 심사위원을 지냈고, 61년부터 93년까지 32년간 서울대
교수로 봉직했다.
55년부터 40여년간 한해도 빠짐없이 각종 국내외전에 참가, "조용하되
치열한 정신의 구도자같은 화가"의 모습을 보여 왔다.
=======================================================================
-근작인 "묵고" 시리즈에 대해 흔히 "그리지 않은 그림"이라고들 합니다.
단색조 화면에 아무 형상이 없어서 그렇겠지요.
갈수록 형상을 배제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정화백=보는 사람 누구나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도록 하고 싶어서지요.
그래서 가능한한 아무것도 나타내지 않으려 하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특정한
이미지를 읽어내고 싶어해요.
한두가지 고정된 이미지의 그림으로 전달되지 않도록 형상을 절제하는
것이지요.
-70년대중반까지 캔버스작업을 하셨죠.
유화를 그리다가 종이 그중에서도 닥을 이용한 작업을 하게 된 까닭을
설명해 주시죠.
<>정화백="무엇을 어떻게 그릴까"라는 명제가 항상 마음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일찌기 비구상쪽을 택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캔버스에 오일로 그리는 것
만으로는 뭔가 성에 안찼죠.
그러다가 종이야말로 한국인의 정서를 가장 잘 대변하는 재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처음엔 캔버스에 종이를 붙였는데 해놓고 나니 그것만으로는 안되겠다
싶었습니다.
고민에 휩싸여 있던 중 닥을 이용해 순수한지를 만드는 과정을 보게
되면서 "이거다" 싶었지요.
-닥종이 작업에 매달리게 된 바탕은 무엇일까요.
갑작스런 것은 아니었을 듯합니다.
<>정화백=어려서 창호지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어요.
아침에 눈을 뜨면 빛이 들어오기 시작해 조반을 먹을 때면 상위에 놓인
밥이며 생선을 비추곤 했죠.
창호지 사이사이에 발라놓은 코스모스 꽃잎의 그림자가 장판에 너울거릴
때면 그 아름다움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것이었고.
나이 들어 그 창호지의 원료인 닥에 매료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지요.
-종이작업인 "닥"과 "묵고" 시리즈는 물론이고 그전의 유화작품에서도 밝고
강렬한 색채나 거센 직선등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어느 화면이나 모두 조용하고 부드러우며 은근한 색채와 내밀한 움직임만이
가득한데요.
<>정화백=나서 자란 장소가 대도시도 아주 시골도 아닌 곳이었어요.
뭔가 극적인 일이 일어나는 법이라곤 없었죠.
내 성격 또한 조용한 편이었고.
시간이 흘러 바래진 창호지나 장판의 색깔이 마음을 편하게 했습니다.
빛과 시간의 앙금이 가라앉아 축적된 듯한 색이 우리 삶의 진정한 모습을
전해준다 싶었던 것이지요.
-"닥"과 "묵고" 시리즈는 물에 풀어진 닥을 화면에 발라 이뤄지는 것
같은데요.
어떻게 시작해서 어디서 끝나나요.
<>정화백=내 작업은 모든 형식이나 의도를 배제한 데서 출발합니다.
서구적 합리주의나 논리 또한 일절 개의치 않지요.
닥을 주무르고 반죽해 화면에 펼치고 두드리는 과정을 통해 종이와 내가
하나가 되는 것을 맛보는 겁니다.
꼭 무엇을 만들겠다, 어떤 것을 나타내겠다가 아니라 물컹물컹한 종이를
만지면서 어릴 적 흙장난을 할 때같은 마음으로 삶의 저편에 아련히 남아
있는 옛것들을 떠올리며 작업하다 보면 내가 종이속에 녹아들어가 완전한
자유를 느끼게 되지요.
-그리려 하지 않은 세계,의도하지 않은 세계를 얻고자 한다는 말씀같군요.
<>정화백=그렇습니다.
구도자들이 어느 순간 선과 도의 세계를 깨닫는 것처럼 동양적 정신과
물질의 조화를 닥을 주무르고 두드리고 펴는 작업을 통해 이뤄보고자 하는
것이지요.
-요즘 화단에도 세계화바람이 한창이고 따라서 소재와 주제, 재료 모두에서
서양의 전위적인 양태를 따르려는 경향이 짙습니다.
인생과 화단 선배로서 어떻게 보십니까.
<>정화백=작품에 대해 설명하기가 쉽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젊은사람들에
대해서도 뭐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잘못 하면 왜곡되거나 오도되기 쉽기 때문이지요.
다른 모든 부문과 마찬가지로 미술도 갑자기 세계 한복판에 던져진 상황
이라 봅니다.
그러나 세계의 조류가 어떻든, 외국사람들이 무엇을 하든 작가는 자기 길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작품속에서 끝없이 자기자신을 발견하는 일이야말로 작업의 시작이요
끝이라고 믿습니다.
-서울대미대 1회 졸업생이시죠.
그옛날에 미술대학에 진학하기가 쉽지 않았을 듯한데요.
그림에 뜻을 두게 된 특별한 동기라도.
<>정화백=어려서 유독 그림을 잘그린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칭찬을 많이 받다보니 잘 그리나보다 생각했고 자연히 미대에 진학하게
된 것이지요.
물론 집안에서는 반대가 심했습니다.
더구나 내가 외아들이었거든요.
-57년 "제1회 현대작가초대전"에 출품하면서 국전과 결별하고 앵포르멜작가
의 선두에 서셨었지요.
<>정화백=세간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특별히 국전을 반대한다든가 한 것은
아니었어요.
단지 그때의 국전은 아카데믹한 작품 위주였고 당시 나를 비롯한 젊은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탐구하고 있어 분위기가 맞지 않았던 거지요.
그러던 차에 조선일보사에서 현대작가초대전이라는 걸 여니까 자연스레
참가하게 됐던 겁니다.
반국전 또는 비국전파라고 규정짓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93년 호암갤러리에서 대규모회고전을 연 것으로 압니다.
올가을에도 전시회를 계획하고 계시다면서요.
최근에 발표해온 "묵고"연작은 색깔이 다소 다양해진 대신 형상은 더욱
단조로와 진듯싶습니다.
<>정화백=11월초부터 갤러리현대에서 보름간 전시회를 엽니다.
색을 좀 넣은 것은 사실입니다.
내 경우에는 그 색도 나중에 칠한다든가 하는 것이 아니고 닥을 물에 푼
상태에서 미리 염색해서 넣는 거에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형상을 의도하는 법은 없고 시간속에 동화된 화강암의
표면처럼 모든 흔적과 얼룩과 우연을 통해 "닥"이라는 물질과 시간 자아
그리고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 남아있는 옛자연이 하나로 만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무 형상도 없는 "묵고" 시리즈의 화면에서 사람들은 한국의 산과 강
바다를 본다고들 합니다.
더러는 태초의 모습을 느끼고 어떤 이들은 바람에 이는 고향의 댓잎과
뒷동산 황토흙을 떠올린다고도 하구요.
<>정화백=그건 보는 사람의 마음과 뜻에 달린 것이겠지요.
거듭 얘기하지만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단 창호지란 바깥의 공기와 움직임을 안쪽에 그대로 전하는 속성을
지녔어요.
빛만 들여보내는 게 아니라 바람과 비 소리도 있는 그대로 느끼게 하지요.
한국인의 삶은 그렇게 안과 밖이 서로 연결되는 가운데 이뤄졌고 따라서
자연친화적인 속성이 강했어요.
한국인이 내 그림에서 자연을 느낀다면 바로 그 때문이겠지요.
-11월의 전시회는 서울대 정년퇴임 후에 갖는 첫번째 개인전인데요.
이번 전시회를 계기로 특별한 계획이라도 있으신지요.
<>정화백=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우리의 민족적 감성의 상징인 "닥"을
통해 나의 실존과 "닥"의 물성이 하나로 동화됨으로써 내 그림이 나와 내가
속해 있는 우리 사회와 시대를 정직하게 반영할 수 있는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저 게으름 피우지 말고 부지런히 그리고 꾸준히
작업해야겠지요.
<대담=박성희 문화부장>
(한국경제신문 1996년 10월 26일자).
서양화단의 원로 정창섭화백(69)은 이같은 물음에 대해 "잘 모르겠다"고
답한다.
50년이상 화판을 붙들어 왔지만 아직까지 그림은 어때야 한다는데 대한
정답을 찾지 못했다는 고백이다.
단지 이제쯤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느껴지는 정도라고 털어
놓는다.
미술계에도 어김없이 불어닥친 세계화바람과 함께 국적불명의 온갖 그림이
난무하는 가운데 우리종이인 닥지를 이용, 한국의 자연과 정신 나아가
태초의 자연과 인간의 모습을 찾아가는 정화백을 서울방배동 화실에서
만났다.
정화백은 충북청주에서 태어나 서울대회화과를 졸업했다(1회).
1950년 5월 "서울대미대졸업전"에서 "산나물"로 총장상을 받았고 53년과
55년 국전에서 특선을 차지했다.
국전 추천작가및 심사위원을 지냈고, 61년부터 93년까지 32년간 서울대
교수로 봉직했다.
55년부터 40여년간 한해도 빠짐없이 각종 국내외전에 참가, "조용하되
치열한 정신의 구도자같은 화가"의 모습을 보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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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작인 "묵고" 시리즈에 대해 흔히 "그리지 않은 그림"이라고들 합니다.
단색조 화면에 아무 형상이 없어서 그렇겠지요.
갈수록 형상을 배제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정화백=보는 사람 누구나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도록 하고 싶어서지요.
그래서 가능한한 아무것도 나타내지 않으려 하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특정한
이미지를 읽어내고 싶어해요.
한두가지 고정된 이미지의 그림으로 전달되지 않도록 형상을 절제하는
것이지요.
-70년대중반까지 캔버스작업을 하셨죠.
유화를 그리다가 종이 그중에서도 닥을 이용한 작업을 하게 된 까닭을
설명해 주시죠.
<>정화백="무엇을 어떻게 그릴까"라는 명제가 항상 마음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일찌기 비구상쪽을 택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캔버스에 오일로 그리는 것
만으로는 뭔가 성에 안찼죠.
그러다가 종이야말로 한국인의 정서를 가장 잘 대변하는 재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처음엔 캔버스에 종이를 붙였는데 해놓고 나니 그것만으로는 안되겠다
싶었습니다.
고민에 휩싸여 있던 중 닥을 이용해 순수한지를 만드는 과정을 보게
되면서 "이거다" 싶었지요.
-닥종이 작업에 매달리게 된 바탕은 무엇일까요.
갑작스런 것은 아니었을 듯합니다.
<>정화백=어려서 창호지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어요.
아침에 눈을 뜨면 빛이 들어오기 시작해 조반을 먹을 때면 상위에 놓인
밥이며 생선을 비추곤 했죠.
창호지 사이사이에 발라놓은 코스모스 꽃잎의 그림자가 장판에 너울거릴
때면 그 아름다움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것이었고.
나이 들어 그 창호지의 원료인 닥에 매료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지요.
-종이작업인 "닥"과 "묵고" 시리즈는 물론이고 그전의 유화작품에서도 밝고
강렬한 색채나 거센 직선등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어느 화면이나 모두 조용하고 부드러우며 은근한 색채와 내밀한 움직임만이
가득한데요.
<>정화백=나서 자란 장소가 대도시도 아주 시골도 아닌 곳이었어요.
뭔가 극적인 일이 일어나는 법이라곤 없었죠.
내 성격 또한 조용한 편이었고.
시간이 흘러 바래진 창호지나 장판의 색깔이 마음을 편하게 했습니다.
빛과 시간의 앙금이 가라앉아 축적된 듯한 색이 우리 삶의 진정한 모습을
전해준다 싶었던 것이지요.
-"닥"과 "묵고" 시리즈는 물에 풀어진 닥을 화면에 발라 이뤄지는 것
같은데요.
어떻게 시작해서 어디서 끝나나요.
<>정화백=내 작업은 모든 형식이나 의도를 배제한 데서 출발합니다.
서구적 합리주의나 논리 또한 일절 개의치 않지요.
닥을 주무르고 반죽해 화면에 펼치고 두드리는 과정을 통해 종이와 내가
하나가 되는 것을 맛보는 겁니다.
꼭 무엇을 만들겠다, 어떤 것을 나타내겠다가 아니라 물컹물컹한 종이를
만지면서 어릴 적 흙장난을 할 때같은 마음으로 삶의 저편에 아련히 남아
있는 옛것들을 떠올리며 작업하다 보면 내가 종이속에 녹아들어가 완전한
자유를 느끼게 되지요.
-그리려 하지 않은 세계,의도하지 않은 세계를 얻고자 한다는 말씀같군요.
<>정화백=그렇습니다.
구도자들이 어느 순간 선과 도의 세계를 깨닫는 것처럼 동양적 정신과
물질의 조화를 닥을 주무르고 두드리고 펴는 작업을 통해 이뤄보고자 하는
것이지요.
-요즘 화단에도 세계화바람이 한창이고 따라서 소재와 주제, 재료 모두에서
서양의 전위적인 양태를 따르려는 경향이 짙습니다.
인생과 화단 선배로서 어떻게 보십니까.
<>정화백=작품에 대해 설명하기가 쉽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젊은사람들에
대해서도 뭐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잘못 하면 왜곡되거나 오도되기 쉽기 때문이지요.
다른 모든 부문과 마찬가지로 미술도 갑자기 세계 한복판에 던져진 상황
이라 봅니다.
그러나 세계의 조류가 어떻든, 외국사람들이 무엇을 하든 작가는 자기 길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작품속에서 끝없이 자기자신을 발견하는 일이야말로 작업의 시작이요
끝이라고 믿습니다.
-서울대미대 1회 졸업생이시죠.
그옛날에 미술대학에 진학하기가 쉽지 않았을 듯한데요.
그림에 뜻을 두게 된 특별한 동기라도.
<>정화백=어려서 유독 그림을 잘그린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칭찬을 많이 받다보니 잘 그리나보다 생각했고 자연히 미대에 진학하게
된 것이지요.
물론 집안에서는 반대가 심했습니다.
더구나 내가 외아들이었거든요.
-57년 "제1회 현대작가초대전"에 출품하면서 국전과 결별하고 앵포르멜작가
의 선두에 서셨었지요.
<>정화백=세간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특별히 국전을 반대한다든가 한 것은
아니었어요.
단지 그때의 국전은 아카데믹한 작품 위주였고 당시 나를 비롯한 젊은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탐구하고 있어 분위기가 맞지 않았던 거지요.
그러던 차에 조선일보사에서 현대작가초대전이라는 걸 여니까 자연스레
참가하게 됐던 겁니다.
반국전 또는 비국전파라고 규정짓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93년 호암갤러리에서 대규모회고전을 연 것으로 압니다.
올가을에도 전시회를 계획하고 계시다면서요.
최근에 발표해온 "묵고"연작은 색깔이 다소 다양해진 대신 형상은 더욱
단조로와 진듯싶습니다.
<>정화백=11월초부터 갤러리현대에서 보름간 전시회를 엽니다.
색을 좀 넣은 것은 사실입니다.
내 경우에는 그 색도 나중에 칠한다든가 하는 것이 아니고 닥을 물에 푼
상태에서 미리 염색해서 넣는 거에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형상을 의도하는 법은 없고 시간속에 동화된 화강암의
표면처럼 모든 흔적과 얼룩과 우연을 통해 "닥"이라는 물질과 시간 자아
그리고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 남아있는 옛자연이 하나로 만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무 형상도 없는 "묵고" 시리즈의 화면에서 사람들은 한국의 산과 강
바다를 본다고들 합니다.
더러는 태초의 모습을 느끼고 어떤 이들은 바람에 이는 고향의 댓잎과
뒷동산 황토흙을 떠올린다고도 하구요.
<>정화백=그건 보는 사람의 마음과 뜻에 달린 것이겠지요.
거듭 얘기하지만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단 창호지란 바깥의 공기와 움직임을 안쪽에 그대로 전하는 속성을
지녔어요.
빛만 들여보내는 게 아니라 바람과 비 소리도 있는 그대로 느끼게 하지요.
한국인의 삶은 그렇게 안과 밖이 서로 연결되는 가운데 이뤄졌고 따라서
자연친화적인 속성이 강했어요.
한국인이 내 그림에서 자연을 느낀다면 바로 그 때문이겠지요.
-11월의 전시회는 서울대 정년퇴임 후에 갖는 첫번째 개인전인데요.
이번 전시회를 계기로 특별한 계획이라도 있으신지요.
<>정화백=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우리의 민족적 감성의 상징인 "닥"을
통해 나의 실존과 "닥"의 물성이 하나로 동화됨으로써 내 그림이 나와 내가
속해 있는 우리 사회와 시대를 정직하게 반영할 수 있는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저 게으름 피우지 말고 부지런히 그리고 꾸준히
작업해야겠지요.
<대담=박성희 문화부장>
(한국경제신문 1996년 10월 2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