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한담] "돈 안벌리는 기초의학 외면 큰 아쉬움"..이호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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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탄 이호왕박사(68)는 한평생 바이러스와 씨름해왔다.
유행성출혈열을 일으키는 한탄바이러스를 지난 76년 발견했다.
한탄바이러스는 한국식으로 명명된 최초의 병원체로 의학교과서에
길이 남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의외로 적다.
우리나라에서 내로라하는 정치가 예술가도 외국에서는 별로 기억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박사는 노벨상감이라는 연구업적이 말해주듯 세계인이
알아주는 몇안되는 한국인 가운데 한명이다.
함경남도 신흥군에서 태어나 서울대의대를 졸업한후 미국
미네소타대학원에서 석.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고려대 의대에서 정년퇴임한후 94년부터 아산생명과학연구소장으로
유행성출혈열의 혼합백신제조에 남은 열정을 쏟아붓고 있다.
최근 세계보건기구(WHO)가 이 연구소를 "WHO 한탄바이러스연구
협력센터"로 지정함으로써 더욱 눈코뜰새 없게 됐다.
고희를 앞둔 지금도 바이러스연구로 세월을 잊고 사는 이호왕박사를
연구소 사무실에서 만났다.
=====================================================================
-지난해 광복 50주년을 맞아 한 언론사가 뽑은 "한국을 빛낸 50인"으로
선정됐는데.
<>이박사 =50명가운데 3명의 과학자를 뽑았고 그중에 하나가 나였습니다.
선정전에 연락을 받지도 않았지요.
역사학자들이 판단해 선정한 때문이어서 나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의대 진학과 바이러스를 연구하게된 동기는 무엇입니까.
<>이박사 =어머니의 권유로 가게 됐죠.
중고등학교 시절에 문학에 관심이 많았고 글도 잘썼는데 외가쪽에
한의학을 하시는 분이 많아 그 영향으로 의과대학에 가게 됐습니다.
해방전후에는 천연두 콜레라 일본뇌염 등이 창궐하는 때여서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됐죠.
의대졸업후 내과를 열려고 했는데 전염병을 제대로 알려면 미생물을
공부하지 않고서는 훌륭한 내과의사가 될 수 없다는 판단이 섰습니다.
미생물공부에 빠져들었고 서울대의대 조교로 있다가 55년 추천으로
미국 미네소타대학에서 유학할때 지도교수의 영향을 받아 바이러스를
전공하게 된 것이 결정적인 동기였습니다.
-한탄바이러스는 한국식으로 명명된 최초의 병원체로 의의가 깊다고
들었습니다.
연구동기와 과정에 대해 들려주시지요.
<>이박사 =60년대 중반까지 매년 5천~6천명의 일본뇌염환자가 발생해
이중 2천~3천명이 사망했습니다.
60년대 후반들어 정부의 적극적인 방역노력으로 뇌염환자는 현저히
줄었고 일본뇌염연구도 진전시킬게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전쟁당시 철의 삼각지인 한탄강유역에서 가장 많은 유엔군
및 한국군 사망자를 낸 병원체를 밝혀내기로 했습니다.
유엔군사령부는 유행성출혈열의 정체를 밝혀내기 위해 52년부터
65년까지 13년간 쿠르병 병원체 발견자인 가이듀섹 등 3명의
노벨상수상자를 포함한 연구진에게 연구비 4천만달러를 지원해
정체규명에 나섰지만 실패했습니다.
우리나라의 문제는 우리힘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에 68년 미육군에
연구비를 신청해 3만불의 연구비를 받았죠.
이후 8년간 연구결과가 나오지 않아 고심한 끝에 76년 신의 가호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구미 여러나라 학자들이 해내지 못한 것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노력한 결과에 운이 따랐다고 말할 수 있죠.
한탄강에서 등줄쥐를 잡아 다른 사람이 검사않고 넘어간 폐조직을
면밀히 검사했더니 우연히 폐의 혈액에서 병원체을 발견하게 된겁니다.
-그밖에 서울 바이러스도 발견했다는데요.
<>이박사 =79년 12월 남아현동의 한 아파트를 관리하던 수위가 경비실에
들어온 쥐를 때려잡은뒤 닷새후에 유행성출혈열 증상을 앓아 종로에
있는 회정병원에 입원했다는 이야기를 접하게 됐습니다.
아파트인근 식료품가게에서 집쥐를 잡아다가 조사해보니 한탄바이러스와
비슷한 바이러스가 발견됐습니다.
한탄바이러스라고 명명했더니 한국인이 발견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지 않아 이번에는 서울바이러스로 이름붙였습니다.
서울바이러스는 한탄바이러스와 단백질과 핵산의 구조가 10%가량
다른 사촌격이죠.
이후 전세계 집쥐들이 서울바이러스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바이러스연구중 연구원이 유행성출혈열에 걸려 고생했다는데 연구중
힘들었던 점은 무엇이었습니까.
<>이박사 =71년 봄에 한탄강유역으로 쥐채집하던 연구원 한명이
유행성출혈열에 걸렸죠.
국군 창동병원에서 한달간 입원한후 간신히 살아났습니다.
그후에도 연구소에서 바이러스를 조작하다 7명이 감염됐습니다.
쉬쉬하며 감출 수밖에 없었고 연구원 가족의 항의때문에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81년 미국 육군성으로부터 감염을 방지할 수 있는 안전시설을 지원받아
비로소 연구의 안전성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연구결과에 대한 국내외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이박사 =일부 긍정적인 입장을 나타낸 사람도 있었지만 수긍하지
않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6개월간 되풀이해 연구결과를 발표했고 미육군성에서 조사관이 나와
유행성출혈열환자와 정상환자의 혈청 샘플을 섞어놓고 구별해내는
시험을 거친 끝에 연구결과가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발견한 이듬해인 77년 1월에는 타임지 기자가 일주일동안 밀착취재를
나왔고 타임지에 보도됐습니다.
이때 미국이 주도하는 세균전계획의 앞잡이노릇을 하느냐는 등의
협박성 괴전화를 받기도 해 곤욕스러웠습니다.
-유행성출혈열 백신도 만드셨죠.
<>이박사 =일찍이 국내 뇌염백신생산에 조언자로 참여했죠.
한탄바이러스 발견후 10년째인 86년 유행성출혈열예방백신을 만들기로
작정했죠.
녹십자가 연구비와 인력을 지원해 89년 결실을 보게 됐습니다.
특허를 획득했고 정부의 전폭적인 지지로 1년만에 제조허가를
얻었습니다.
바이러스를 발견하고 동시에 예방백신을 개발하는 것은 드문일 입니다.
-최근의 연구프로젝트는 무엇입니까.
<>이박사 =백신은 한번만 맞으면 여러 전염병을 동시에 예방하는
것이 좋습니다.
지난해 제2종 법정전염병인 일본뇌염과 유행성출혈열의 혼합백신개발에
성공했고 최근에는 간염 일본뇌염 유행성출혈열을 동시에 예방할 수
있는 3가혼합백신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동물실험에서는 3가혼합백신의 효과가 이미 증명된 상태입니다.
-우리나라의 기초의학 연구환경은 어떻습니까.
<>이박사 =70년대까지만해도 연구비지원은 거의 전무했습니다.
80년대부터 정부차원의 지원이 시작됐고 90년대 들어서는 GNP를
감안할때 많은 연구비가 지출되고 있습니다.
오히려 외국 학자가 국내 연구지원금을 따내려고 노력하고 있죠.
연구비가 없어 연구를 못하는 시절은 지난 것같습니다.
-국내 백신생산업체의 수준과 중점을 두고 나가야할 방향은.
이 분야에 적극 투자하면 우리나라도 세계선두에 설 수 있는 승산이
있다고 보는지요.
<>이박사 =아시아권에서는 일본과 함께 백신생산수준이 단연 높죠.
그러나 연구학자의 숫자와 수준을 생각하면 선진국에 비해 크게
낙후돼있습니다.
유전공학으로 만든 백신이 간염백신 하나밖에 없다는게 그증거입니다.
대기업이 남이 일궈놓은 백신시장에 끼어들어 돈을 벌려는 것은
잘못입니다.
대기업은 독자적인 목표를 설정하고 연구인력과 자금에 대한 투자를
더욱 강화해야 할 것입니다.
-후학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이박사 =어떤 연구에 몸담게 되면 한우물을 파는 정신이 필요합니다.
놀면서 연구하는 것은 보통사람이고 밤잠을 자지 않고 연구에 몰두해야
훌륭한 연구업적을 남길 수 있습니다.
연구에 흥미를 갖고 즐기는 유전학적 연구체질이라면 연구에 성공할
수 있습니다.
-의대생들이 돈잘버는 성형외과 등에 몰리고 어렵고 힘든 기초의학
분야에는 진출을 기피한다고 들었습니다.
실상은 어떤지요.
<>이박사 =60년대까지만해도 의대에서 성적이 좋은 사람은 기초의학을
전공했는데 70년대부터는 수입이 좋은 임상쪽으로 재원이 몰리고
있습니다.
물질문명과 안락한 생활을 추종하는 풍토때문에 기초의학이 등한시되고
있는 거지요.
장래의 국내 의학발전에 적잖은 걸림돌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연구는 노력만 갖고 되는게 아니고 역시 좋은 두뇌가 밑바탕이 됩니다.
-우리나라도 노벨의학상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박사 =70년대만 하더라도 병원체만 발견하면 노벨상감이 됐습니다.
지금은 이런 연구업적에 인류의 삶의 질을 개선할 보충연구가
뒷받침돼야만 수상할 자격이 됩니다.
우리나라도 노벨상을 수상할 경제적 학술적 수준에 이르고 있습니다.
일본이 전후의 잿더미속에서 46년 유가와의 노벨물리학상수상으로
전자산업이 일어서고 경제회복의 전기를 맞이한 것처럼 우리나라도
일단 수상자가 배출되면 과학발전의 기폭제 역할을 하리라 생각합니다.
-최근 아산생명과학연구소가 "WHO 한탄바이러스 연구협력센터"로
지정됐는데 구체적 역할은 무엇입니까.
<>이박사 =95년까지 제가 몸담았던 고려대 의대 바이러스연구소가
연구협력센터로 지정됐다가 아산생명과학연구소로 옮기게 되자 이번에
새로 지정된 것입니다.
한탄바이러스진단시약을 전세계에 공급하고 진단방법의 표준화를
진행하게 됩니다.
유행성출혈열은 치사율이 바이러스종류에 따라 1~80%에 이르고 있으나
치료약이 없는 실정이어서 치료약연구도 병행하게 됩니다.
한탄바이러스에 대한 연구서를 출판하고 관련 역학정보를 WHO에
보고하는 역할도 하게 됩니다.
-좋아하는 운동과 건강유지 비결은.
<>이박사 =원래 건강한 편입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저녁 11시께 자는 규칙적인 생활을 합니다.
1주일에 3번씩 헬스클럽에 나가고 골프도 매주 한번씩 칩니다.
한창때는 핸디 7정도 쳤고 나이를 먹어 약간 스코어가 떨어졌죠.
<< 대담 = 김형근 과학정보통신 부장 >>
(한국경제신문 1996년 10월 19일자).
유행성출혈열을 일으키는 한탄바이러스를 지난 76년 발견했다.
한탄바이러스는 한국식으로 명명된 최초의 병원체로 의학교과서에
길이 남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의외로 적다.
우리나라에서 내로라하는 정치가 예술가도 외국에서는 별로 기억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박사는 노벨상감이라는 연구업적이 말해주듯 세계인이
알아주는 몇안되는 한국인 가운데 한명이다.
함경남도 신흥군에서 태어나 서울대의대를 졸업한후 미국
미네소타대학원에서 석.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고려대 의대에서 정년퇴임한후 94년부터 아산생명과학연구소장으로
유행성출혈열의 혼합백신제조에 남은 열정을 쏟아붓고 있다.
최근 세계보건기구(WHO)가 이 연구소를 "WHO 한탄바이러스연구
협력센터"로 지정함으로써 더욱 눈코뜰새 없게 됐다.
고희를 앞둔 지금도 바이러스연구로 세월을 잊고 사는 이호왕박사를
연구소 사무실에서 만났다.
=====================================================================
-지난해 광복 50주년을 맞아 한 언론사가 뽑은 "한국을 빛낸 50인"으로
선정됐는데.
<>이박사 =50명가운데 3명의 과학자를 뽑았고 그중에 하나가 나였습니다.
선정전에 연락을 받지도 않았지요.
역사학자들이 판단해 선정한 때문이어서 나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의대 진학과 바이러스를 연구하게된 동기는 무엇입니까.
<>이박사 =어머니의 권유로 가게 됐죠.
중고등학교 시절에 문학에 관심이 많았고 글도 잘썼는데 외가쪽에
한의학을 하시는 분이 많아 그 영향으로 의과대학에 가게 됐습니다.
해방전후에는 천연두 콜레라 일본뇌염 등이 창궐하는 때여서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됐죠.
의대졸업후 내과를 열려고 했는데 전염병을 제대로 알려면 미생물을
공부하지 않고서는 훌륭한 내과의사가 될 수 없다는 판단이 섰습니다.
미생물공부에 빠져들었고 서울대의대 조교로 있다가 55년 추천으로
미국 미네소타대학에서 유학할때 지도교수의 영향을 받아 바이러스를
전공하게 된 것이 결정적인 동기였습니다.
-한탄바이러스는 한국식으로 명명된 최초의 병원체로 의의가 깊다고
들었습니다.
연구동기와 과정에 대해 들려주시지요.
<>이박사 =60년대 중반까지 매년 5천~6천명의 일본뇌염환자가 발생해
이중 2천~3천명이 사망했습니다.
60년대 후반들어 정부의 적극적인 방역노력으로 뇌염환자는 현저히
줄었고 일본뇌염연구도 진전시킬게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전쟁당시 철의 삼각지인 한탄강유역에서 가장 많은 유엔군
및 한국군 사망자를 낸 병원체를 밝혀내기로 했습니다.
유엔군사령부는 유행성출혈열의 정체를 밝혀내기 위해 52년부터
65년까지 13년간 쿠르병 병원체 발견자인 가이듀섹 등 3명의
노벨상수상자를 포함한 연구진에게 연구비 4천만달러를 지원해
정체규명에 나섰지만 실패했습니다.
우리나라의 문제는 우리힘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에 68년 미육군에
연구비를 신청해 3만불의 연구비를 받았죠.
이후 8년간 연구결과가 나오지 않아 고심한 끝에 76년 신의 가호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구미 여러나라 학자들이 해내지 못한 것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노력한 결과에 운이 따랐다고 말할 수 있죠.
한탄강에서 등줄쥐를 잡아 다른 사람이 검사않고 넘어간 폐조직을
면밀히 검사했더니 우연히 폐의 혈액에서 병원체을 발견하게 된겁니다.
-그밖에 서울 바이러스도 발견했다는데요.
<>이박사 =79년 12월 남아현동의 한 아파트를 관리하던 수위가 경비실에
들어온 쥐를 때려잡은뒤 닷새후에 유행성출혈열 증상을 앓아 종로에
있는 회정병원에 입원했다는 이야기를 접하게 됐습니다.
아파트인근 식료품가게에서 집쥐를 잡아다가 조사해보니 한탄바이러스와
비슷한 바이러스가 발견됐습니다.
한탄바이러스라고 명명했더니 한국인이 발견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지 않아 이번에는 서울바이러스로 이름붙였습니다.
서울바이러스는 한탄바이러스와 단백질과 핵산의 구조가 10%가량
다른 사촌격이죠.
이후 전세계 집쥐들이 서울바이러스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바이러스연구중 연구원이 유행성출혈열에 걸려 고생했다는데 연구중
힘들었던 점은 무엇이었습니까.
<>이박사 =71년 봄에 한탄강유역으로 쥐채집하던 연구원 한명이
유행성출혈열에 걸렸죠.
국군 창동병원에서 한달간 입원한후 간신히 살아났습니다.
그후에도 연구소에서 바이러스를 조작하다 7명이 감염됐습니다.
쉬쉬하며 감출 수밖에 없었고 연구원 가족의 항의때문에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81년 미국 육군성으로부터 감염을 방지할 수 있는 안전시설을 지원받아
비로소 연구의 안전성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연구결과에 대한 국내외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이박사 =일부 긍정적인 입장을 나타낸 사람도 있었지만 수긍하지
않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6개월간 되풀이해 연구결과를 발표했고 미육군성에서 조사관이 나와
유행성출혈열환자와 정상환자의 혈청 샘플을 섞어놓고 구별해내는
시험을 거친 끝에 연구결과가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발견한 이듬해인 77년 1월에는 타임지 기자가 일주일동안 밀착취재를
나왔고 타임지에 보도됐습니다.
이때 미국이 주도하는 세균전계획의 앞잡이노릇을 하느냐는 등의
협박성 괴전화를 받기도 해 곤욕스러웠습니다.
-유행성출혈열 백신도 만드셨죠.
<>이박사 =일찍이 국내 뇌염백신생산에 조언자로 참여했죠.
한탄바이러스 발견후 10년째인 86년 유행성출혈열예방백신을 만들기로
작정했죠.
녹십자가 연구비와 인력을 지원해 89년 결실을 보게 됐습니다.
특허를 획득했고 정부의 전폭적인 지지로 1년만에 제조허가를
얻었습니다.
바이러스를 발견하고 동시에 예방백신을 개발하는 것은 드문일 입니다.
-최근의 연구프로젝트는 무엇입니까.
<>이박사 =백신은 한번만 맞으면 여러 전염병을 동시에 예방하는
것이 좋습니다.
지난해 제2종 법정전염병인 일본뇌염과 유행성출혈열의 혼합백신개발에
성공했고 최근에는 간염 일본뇌염 유행성출혈열을 동시에 예방할 수
있는 3가혼합백신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동물실험에서는 3가혼합백신의 효과가 이미 증명된 상태입니다.
-우리나라의 기초의학 연구환경은 어떻습니까.
<>이박사 =70년대까지만해도 연구비지원은 거의 전무했습니다.
80년대부터 정부차원의 지원이 시작됐고 90년대 들어서는 GNP를
감안할때 많은 연구비가 지출되고 있습니다.
오히려 외국 학자가 국내 연구지원금을 따내려고 노력하고 있죠.
연구비가 없어 연구를 못하는 시절은 지난 것같습니다.
-국내 백신생산업체의 수준과 중점을 두고 나가야할 방향은.
이 분야에 적극 투자하면 우리나라도 세계선두에 설 수 있는 승산이
있다고 보는지요.
<>이박사 =아시아권에서는 일본과 함께 백신생산수준이 단연 높죠.
그러나 연구학자의 숫자와 수준을 생각하면 선진국에 비해 크게
낙후돼있습니다.
유전공학으로 만든 백신이 간염백신 하나밖에 없다는게 그증거입니다.
대기업이 남이 일궈놓은 백신시장에 끼어들어 돈을 벌려는 것은
잘못입니다.
대기업은 독자적인 목표를 설정하고 연구인력과 자금에 대한 투자를
더욱 강화해야 할 것입니다.
-후학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이박사 =어떤 연구에 몸담게 되면 한우물을 파는 정신이 필요합니다.
놀면서 연구하는 것은 보통사람이고 밤잠을 자지 않고 연구에 몰두해야
훌륭한 연구업적을 남길 수 있습니다.
연구에 흥미를 갖고 즐기는 유전학적 연구체질이라면 연구에 성공할
수 있습니다.
-의대생들이 돈잘버는 성형외과 등에 몰리고 어렵고 힘든 기초의학
분야에는 진출을 기피한다고 들었습니다.
실상은 어떤지요.
<>이박사 =60년대까지만해도 의대에서 성적이 좋은 사람은 기초의학을
전공했는데 70년대부터는 수입이 좋은 임상쪽으로 재원이 몰리고
있습니다.
물질문명과 안락한 생활을 추종하는 풍토때문에 기초의학이 등한시되고
있는 거지요.
장래의 국내 의학발전에 적잖은 걸림돌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연구는 노력만 갖고 되는게 아니고 역시 좋은 두뇌가 밑바탕이 됩니다.
-우리나라도 노벨의학상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박사 =70년대만 하더라도 병원체만 발견하면 노벨상감이 됐습니다.
지금은 이런 연구업적에 인류의 삶의 질을 개선할 보충연구가
뒷받침돼야만 수상할 자격이 됩니다.
우리나라도 노벨상을 수상할 경제적 학술적 수준에 이르고 있습니다.
일본이 전후의 잿더미속에서 46년 유가와의 노벨물리학상수상으로
전자산업이 일어서고 경제회복의 전기를 맞이한 것처럼 우리나라도
일단 수상자가 배출되면 과학발전의 기폭제 역할을 하리라 생각합니다.
-최근 아산생명과학연구소가 "WHO 한탄바이러스 연구협력센터"로
지정됐는데 구체적 역할은 무엇입니까.
<>이박사 =95년까지 제가 몸담았던 고려대 의대 바이러스연구소가
연구협력센터로 지정됐다가 아산생명과학연구소로 옮기게 되자 이번에
새로 지정된 것입니다.
한탄바이러스진단시약을 전세계에 공급하고 진단방법의 표준화를
진행하게 됩니다.
유행성출혈열은 치사율이 바이러스종류에 따라 1~80%에 이르고 있으나
치료약이 없는 실정이어서 치료약연구도 병행하게 됩니다.
한탄바이러스에 대한 연구서를 출판하고 관련 역학정보를 WHO에
보고하는 역할도 하게 됩니다.
-좋아하는 운동과 건강유지 비결은.
<>이박사 =원래 건강한 편입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저녁 11시께 자는 규칙적인 생활을 합니다.
1주일에 3번씩 헬스클럽에 나가고 골프도 매주 한번씩 칩니다.
한창때는 핸디 7정도 쳤고 나이를 먹어 약간 스코어가 떨어졌죠.
<< 대담 = 김형근 과학정보통신 부장 >>
(한국경제신문 1996년 10월 1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