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견아, 이 시들을 한번 읽어봐주렴"

대옥이 시 두루마리들 중에서 몇 편을 골라 자견에게 건네주었다.

자견은 그 동안 대옥의 어깨너머로 문자를 배워 왔기 때문에 시를 읽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자견이 시 두루마리 하나를 펼쳐 들었다.

대옥이 지은 수십 편의 시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여겨지는
시였다.

자견이 사뭇 떨리는 목소리로 그 시를 읽어나갔다.

어젯밤 뜨락에서 슬픈 노래 들리더니
그것은 스러져가는 꽃넋의 흐느낌이던가
나도 겨드랑이에 날개 돋아
저 꽃넋을 따라 가고파라
아, 하늘 끝 어디에 꽃무덤이 있으리
지금은 네가 죽어서 내가 묻어주지만
이 몸 어느날 죽으면 그 누가 묻어줄까
봄이 왔다 가듯이 꽃이 피었다 지듯이
사람도 한번 왔다 가고 말 것을

마치 대옥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지은 시처럼 느껴져 자견은 그만
목이 메어 흐느꼈다.

대옥의 눈에서도 두 줄기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대옥은 자견이 읽은 시 두루마리를 다시 받아 옆에 두었다.

"다른 시들도 읽어야지"

대옥이 마음을 진정시키고 조용히 말하자 자견도 흐느낌을 그치고
시 두루마리를 집어들었다

눈물 젖은 눈으로 꽃을 바라보니
어느새 눈물마저 마르는구나
눈물이 마르면 봄도 가고 꽃도 시들리라
시든 꽃을 들고 있는 파리한 얼굴이여
꽃잎들은 날아가고 인생의 황혼이 찾아오네
접동새 울음에 끝내 봄은 가고
적막한 주렴에는 달빛만이 젖어드네

그 시는 보채와 상운, 보금, 탐춘, 보옥 들과 해당시사를 도화시나로
명칭을 바꾸면서 지은 시가 아니던가.

대옥은 시사회원들과 어울려 깔깔대면서 도향촌으로 몰려가던 일들을
떠올리며 희미하게 미소를 짓다 말고 또 눈물을 글썽거렸다.

자견이 대옥이 상운과 말짓기 놀이를 하면서 지었던 시 한 편을
더 읽고 나자 대옥이 시 두루마리들을 거두더니 그것들을 눈 깜짝할
사이에 화롯불에 던져버렸다.

화로 옆에 있던 설안이 화들짝 놀라며 종이 두루마리들을 급히 끄집어
내었으나 이미 거의 다 타버린 뒤였다.

아까 그 손수건보다 종이 두루마리가 더 잘 탈 것은 뻔한 이치였다.

"꽃이 지고 나면 아무 흔적도 남지 않는 법. 나도 세상을 살다 간
흔적을 하나도 남겨놓지 않으련다"

그 말과 함께 대옥이 발작을 하듯이 기침을 하더니 또 피를 토해
내었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0월 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