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체부는 한글날이 들어 있는 "10월의 문화인물"로 국어학자를 자주
등장시킨다.

작년은 김윤경(1894~1969)이었고 금년엔 건재 정인승(1897~1986)이다.

정인승은 전북 장수에서 농가 차남으로 태어나 한학자였던 부친(상조)으로
부터 한문을 배우다 만학으로 신학문을 익히게 된다.

그의 일가인 정인보가 교수로 있던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들어가 29세때
졸업한다.

그가 한글과 더불어 평생을 지나게 된 동기는 백남석교수에게 영문법을
배우면서 우리 한글문법에 관심을 갖게 된데서 비롯된다.

건재 그는 고향 근처인 고창고보에서 10년간 교편을 잡은뒤 김현배 김윤경
등의 요청으로 1935년 4월부터 한글사전의 편집주간으로 편찬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수많은 역경을 이겨내지 않으면 안됐었다.

1942년 10월1일 이른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붙잡혀 3년간
옥고를 치뤄야 했다.

그는 광복으로 1945년 8월17일 출옥했으나 한글사전 원고의 소재를
알수없어 천신만고 끝에 남대문역 창고에서 찾아낸다.

또 6.25전쟁으로 사전편찬 원고및 미 록펠러재단에서 지원받았던 용지마저
소실되고 만다.

그는 이런 역경을 딛고서 57년에 "큰사전"전 6권을 22년만에 완간했다.

무서운 의지력과 집념의 소산이라 할수 있다.

그는 생전에 "조선어"에 집착하게 된 원인을 "일본사람들이 싫어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 적이 있다.

조선어학회(광복후 한글학회)는 "큰사전" 편찬에 앞서 몇가지 정지작업을
해야 했다.

먼저 한글의 맞춤법과 표준말 그리고 외래어표기법을 통일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어학회는 1933년에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발표했고 35년에 "표준말
모음"을 공표했으며 41년엔 "외래어표기법 통일안"을 내어 놓았다.

조선어학회의 이같은 노력은 지금 생각하면 남북분단으로 북한에서 다소
변형은 됐지만 우리민족의 어문생활의 통일적 기초를 다졌다는 뜻에서
높이 평가된다.

정인승은 한글의 연구와 교수라는 외길을 걸었다.

그는 전북대 교수와 총장을 지냈고 학술원 회원및 원로회원을 역임했지만
그의 생활은 청빈하기로 유명했다.

그가 90세로 임종한 서울 안암동의 대지 18평에 건평10평의 자택은 그나마
제자들이 마련해준 것이었다 한다.

건재는 이 시대에 남아 있던 몇명 안되는 선비중의 한사람이었다고
생각된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0월 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