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성국 < 한국미쓰이물산 대표 >

나진.선봉 개발 프로젝트가 "완결형"이 아니라는 사실은 전회에 이미
밝혔다.

부연 설명을 하면 아직 아무것도 확정된 것은 없다.

중화학공업단지로 개발하는 방안이 가장 바람직하다는게 도요엔지니어링의
잠정 결론일 뿐이다.

북한도 이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는 수준이라고 보면 된다.

게다가 이같은 계획이 제대로 추진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도 많다.

우선 두만강 물을 공업 용수로 쓸 수 있느냐 하는 점이 고려돼야 한다.

수질조사가 따라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또 평야지대와 구릉지대에 대한 조사활동도 필요하다.

공장 입지로서 적합한지에 대해서 보다 철저한 실사작업이 병행돼야 할
것이다.

요는 이제부터가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일본 자본이 나진.선봉을 개발하는데 주도권을 잡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남한 자본의 참여 없이는 나진.선봉 개발 프로젝트가 성공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북한측이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일본종합상사들은 절대로 위험 부담을 먼저 지려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

정치적 상황이 악화돼 한국측에서 인위적으로 자본 참여를 막는 경우라면
모를까.

앞으로의 진행 상황은 유동적이지만 일본쪽에 무게중심이 실릴 가능성은
희박하다는게 도요엔지니어링을 포함한 우리 일행의 견해다.

한가지 시사점은 북한의 공업발전과정이 같은 사회주의권인 소련이나
동유럽과는 다르다는 점이다.

소련과 동유럽의 경우 중공업과 석유화학 산업을 결합한 중화학공업화
전략을 경제발전의 축으로 했다.

반면 북한은 석유화학이 배제된 중공업 위주 전략으로 일관했다.

이는 자력갱생 원칙에 따른 주탄종유 정책 때문이었다.

일반적으로 석유화학산업은 일상생활에 필수적인 플라스틱 제품을
생산하는 산업이라는 점에서 경공업 전체를 선도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북한의 경우 산업화과정에서 석유화학산업을 제대로 육성시키지
못했다.

따라서 최근 "경공업 제일주의"로 방향을 바꾼 북한이 경공업의 견인차가
될 석유화학산업에 눈을 돌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북한이 현재의 조건에서 석유화학 산업을 발전 시킬 수 있는 지름길은
원유공급이 중단돼 가동 정지 상태인 나진.선봉 지대의 승리화학공장을
재가동하는 것이라고 본다.

승리화학공장은 연산 2백만톤의 원유정제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 자체로는 그다지 큰 규모가 아니다.

그러나 승리화학공장을 중심으로 나진.선봉 지대 전체를 석유화학공단으로
개발하게 되면 북한경제에 상당한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는 판단이다.

투자설명회의 공식 일정중엔 한국기업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세미나가
여러차례 열렸다.

첫째날 오후엔 임태덕 대외경제협력추진협의회 부위원장이 "나진.선봉
자유무역지대의 개발상황과 마스터 플랜"에 대해 설명했다.

대체로 이러저러하게 개발하겠다는 계획안을 밝힌 것이다.

또 대외경제협력위의 황정남과장은 "자유무역지대 내에서의 외국인
투자가에 대한 우대조치"에 대해 간략한 브리핑을 했다.

기업소득세율은 14%, 장려부문은 10%이며 "3년간 면세에 이후 2년간은 50%
감면"한다는 내용의 세금우대정책도 있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대성은행과 홍콩 페레그린간의 합영은행(대성-
페레그린) 측에서 "나진.선봉 지구내에서의 금융서비스 상황과 앞으로의
전망"에 대해 브리핑한 내용이다.

이는 대성-페레그린의 알란 마사 이사장이 직접 맡아서 설명했다.

둘째날 오전엔 "나진 선봉지구를 관광지대로 개발하는 안"(황봉혁 북한
관광총국 국장), "훈춘시와의 비즈니스 찬스"(훈춘시장), "중화학 공업단지
개발 구상"(일본 싱와물산) 등을 주제로 한 세미나가 차례로 열렸다.

종합 질의.응답시간엔 김수용 김일성대학 경제학부 교수와 김운렬 대외
경제협력추진위원회 부위원장, 신문순 나진.선봉 행정경제위원회 협력국장
등이 나와서 답변했다.

질문은 주로 북한측이 갖고 있는 앞으로의 개발계획에 집중됐다.

답변자중 김수용 교수는 나진.선봉지역 설치를 뒷받침하기 위해 북한의
법과 제도를 정비한 주역중 한사람이다.

김교수는 "외국인들이 투자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도록 법과 제도를
정비중"이라고 밝혔다.

북한의 법안은 대체로 중국의 경제 특구나 베트남의 개방정책을 비교
연구해서 만든 것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어땠든 초기 단계인 것만은 분명하다.

마지막 날은 현지시찰이 있었다.

나는 갔다온 사람들로부터 얘기만 들었다.

두조로 나뉘어 한조는 나진항과 어류가공공장, 피복가공공장 등을
시찰했고 다른 한조는 발전소와 선봉항, 선봉지역 유적지를 둘러보았다고
한다.

나진항엔 "크레인이 17대, 트럭을 포함한 자동차가 30대 있다"는 설명을
들었다.

나진에 머무는 동안 자동차를 탈 기회가 있었다.

운전수의 월급이 100원(인민화폐)수준이라고 전해 들었다.

북한의 공식환율은 1달러당 2원정도니까 공식환율대로라면 50달러 정도다.

그러나 인민폐의 화폐가치가 많이 떨어져 있어 실제 구매능력으로 보면
이에 크게 못미칠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북한 경제가 어렵다는 반증이라는 생각이다.

호텔에는 외국인만을 대상으로 한 담배 가게도 있었다.

일제 마일드세븐이 10갑들이 한보루에 1달러60센트밖에 하지 않을 정도로
값이 쌌다.

나진.선봉 지대내에는 50-80명 규모를 수용할 수 있는 남산호텔과
60-8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비파호텔이 있다.

비파호텔은 건물이 따로따로 설계돼 있어 외국인 가족이 거주하기에
유리한 조건을 갖고 있다는게 북한측 설명이었다.

투자설명회를 위해 지은 나진 관광호텔은 객실이 2백40개에 달한다.

또 장기체류형으로 설계된 10여개의 방들도 있다고 들었다.

나진 호텔은 국내 일류 호텔 못지 않은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나진 외국인 숙소(방 두칸)의 임대료는 일 32원, 남산 호텔의 경우 하루
숙박료가 60원 정도다.

이 지대내에서 외국인들의 생활조건은 전적으로 시의 행정경제위원회가
담당하고 있다.

금융지원도 이루어지고 있다는게 북한당국의 설명이다.

나진.선봉지대내에 삼각주 은행이 있으며 이 은행을 통해 외환송금이나
예금 대부 보험 등 각종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또 앞으로 외국기업이 들어오는 정도에 따라 대성-홍콩 페레그린 합영은행
등도 나진.선봉지역으로 옮겨 올 예정이라고 대외경제협력위원회측은
브리핑했다.

이제 긴 글을 끝맺을 때가 된 것 같다.

나 개인적으로는 투자설명회에 참가한 의의가 컸다.

고향 땅도 밟아 보았고 혈육도 만났다.

북한측 인사들과도 교류의 폭을 넓혔다.

분명한 점은 나진.선봉개발이 남.북한 모두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정치적인 문제로 양자간의 관계가 악화된다 하더라도 인내심을 갖고
꾸준히 추진하는 끈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또 접촉창구만은 항상 열어두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그런 것일듯 싶다.

나진항을 떠나던 날 배위에서 바라본 고향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그제서야 눈물이 내 볼을 타고 흘렀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9월 2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