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냐 출신의 종교학자 존 음비티의 저서 "아프리카의 종교와 철학"에는
아프리카인들의 시간에 대한 전통적 관념을 알려주는 흥미있는 대목이
나온다.

그의 오랜 연구결과에 따르면 아프리카인들의 머리속에는 "과거"와
"현재"만이 자리잡고 있을 뿐 "미래"는 없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삶의 과정에 어떤 의무를 부여하고 그것이 실재적인
것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경험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아프리카인들은 그 시간의 일부를 자신의 개인적인 삶속에서
경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출생하기 이전 몇 세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과거사회를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한다.

"미래"는 전혀 경험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일단 일어난 사건은 "현재"와 "과거"속으로 전개된다.

시간이 전진하지 않고 후진하는 셈이다.

실제로 동아프리카 언어에는 "미래"에 대한 생각을 전달해 주는
구체적인 용어나 표현이 전혀 없다는 것이 음비티의 분석이다.

음비티는 서구적인 교육을 받은 탓으로 지금은 아프리카인들의 머리
속에도 "미래"에 대한 생각이 어느정도 자리잡기 시작했지만 아직 민간
사고의 기층에는 전통적 사유방법이 깔려있어 아프리카의 정치적
불안이나 경제개발의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아직 많은 사람들이 원색적인 삶을 영위해 가고
있는 먼나라의 우스꽝스러운 이야기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불과 반세기전까지만해도 우리나라 역시 과거지향적인 성격이
짙은 나라였다.

아프리카처럼 "미래"가 없었다고 할 수는 없어도 전통을 따라서 살고
전통이 생활의 지표, 삶의 원리인 사회에서 살았다.

"윗대"의 권위와 가치가 그대로 나의 가치였고 나의 권위를 유지해
주었다.

전통에 대한 통찰도 반성도 없이 무의식적으로 "과거"를 따르며 살았다.

이무렵 어떤 철학자는 순수한 한국어에 "어제" "오늘"이란 말은 있어도
"내일"만이 유독 한자인 것을 예로 들어 "한민족은 미래가 없는 민족"
이라고 꼬집었다.

그 뒤의 과정이야 어찌됐든 지금 우리나라는 선진국 문턱에 와있다.

그런데도 요즘 세태를 보면 나중에야 어떻게 되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우선 목적달성을 하고 보자는 사고가 사회 전체에 팽배해 있다.

남이야 어떻게 되든, 사회야 어떻게 되든,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런 사고에는 "미래"가 발붙일 틈새가 없고 오로지 "현재"만이 있을
뿐이다.

"신한국창조"를 구호로 내세우며 출범했던 문민정부의 서슬 퍼런 사정
개혁이 연이어도 우리사회에서 부정 부패는 사라질줄 모르고 있다.

교육감 선거에 수억원의 뇌물이 오가는 실정이라면 "교육개혁"은
요원해 보인다.

폭력조직이 아직 날뛰고 성폭력이 횡행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삶의
질" 운운하는 것도 너무 사치스런 구호로만 들린다.

경제불황 속에서 휴가철인 지난 7,8월에 해외관광으로 쓴 돈이
1조2,000억원에 이르고 추석 해외관광 항공권이 매진됐다는 보도는
"미래"는 아랑곳 하지 않고 오로지 "현재"를 즐기려는 우리들의
속마음을 읽게 해주는 예이다.

특히 그 가운데서도 소위 대권후보라는 사람들의 지역패권주의를
조장하는 듯한 언행은 우리의 "미래"가 없어질 것 같은 불길한 조짐으로
여겨진다.

여권의 개혁이 표류하고 있다는 우려와 함께 한마디로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우리의 정치 경제 사회의 혼란은 불안하기만 하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이런 혼란스런 세태는 그리스의 도시국가였던
아테네의 전성기(5세기께)의 정신사조를 연상케 한다.

강적 페르시아의 대군을 천우신조로 무찌른 아테네는 그리스는 물론
지중해의 패권을 차지하게 됐다.

명문거족 출신이 아니라도 국정에 참여할 수 있게 된 페리클레스
시대에는 귀족정치가 민주정치로 변했다.

누구나 마음대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시대를 맞았다.

국회나 법정, 또는 대중이 모인 곳에서 가장 지배적인 힘을 가진 것은
말을 잘하는 사람일 수밖에 없다.

능변가가 되려면 백과전서적인 박학이 요구됐고 수사학이 필요했는데
이 때문에 득세할 수 있었던 것이 소피스트(궤변론자)들이다.

그들에게는 젊은이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그들은 제자들에게
능변술을 가르쳤다.

소피스트들은 "인간을 만물의 척도"로 삼고 적극적인 대외활동을 통해
진리를 자각하려는 생각에서 출발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인간사회에서 자연현상에서 볼 수 있는 객관적 필연성을
찾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모든 인위적인 것, 사회적인 것이 마치 아무런 진실성이나
절대성을 갖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사회나 국가가 확고한 정견이 없게 된 것을 틈타 제멋대로
논쟁하며 행동한 결과, 결국 무질서와 도덕적 퇴폐를 초래하는 악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다.

이때 "너 자신을 알라"는 자기반성을 통한 자각을 외치며 국가를
구하기 위해 나선 사람이 소크라테스였다.

그러나 이미 그때는 아테네인들이 "이상국가" 실현이라는 "미래"를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아테네인들은 알렉산더대왕에게 정복당해 "미래"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롤스로이스로 허니문 여행을 하고 캐딜락으로 장의차를 타는 것도 멋진
일이지만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할 것은 우리들이 사는 사회나 국가에 대한
구성원으로서의 자기반성적 자각이다.

소피스트가 아니라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대권후보의
등장이 기다려지는 것은 너무 오래 "미래"가 없는 듯 보이는 사회에서
살아오고 있는 탓인지도 모르겠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9월 1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