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과 함께 걸어온 길] (11) 국산 군용무전기 KPRC-6 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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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욱 <한국이동통신 사장>
1970년 8월 국방과학연구소가 의욕적으로 출범하긴 했지만 처음부터
뚜렷한 연구 개발 활동을 보인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당장의 연구 과제가 없더라도 나는 외부 연구소 활용, 기술
자료 확보, 관리 기법 개발, 연구 장비 확보,연구원 유치 및 교육 등에
관심을 갖고 미래에 대비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미국 일본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이스라엘 같은 나라들이
어떻게 무기 체계를 연구개발하고 상품화하고 있는지에 관한 기술 정보
수집에 노력했다.
진리는 상식속에서 발견되고, 기회는 준비된 사람을 찾아오고, 도움은
가까운 곳에서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나의 믿음이다.
마침 ADD에 흡수될 노량진 육군기술 연구소의 장비를 나는 눈여겨봤다.
그 이유는 내가 다닌 서울 공대의 이승원 박민호 이종완 교수님들이
국방과학기술연구소에 겸직으로 계셔 당시의 대학으로는 엄두도 내지 못할
고가의 계측기, 연구 장비를 갖추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시험검사소로 격하되어 퇴색했지만 장비는 쓸만한것이 남아
있으리라 생각했다.
나는 우선 시험검사소에서 장비 관리를 맡고 있던 박문규를 만났다.
그는 한전 산하의 공고를 졸업하고 대학에서 원자력공학을 전공하여
그 무렵 원자력발전소에 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수선한 중에도 성실히 장비 관리를 해 온 그를 보고 나는 이런
사람이야말로 함께 일할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붙들었다.
한편 진공관과 반도체 소자 회로에 능한 사람을 구하던 중 나는
공군사관학교에서 인공위성 신호 관측 시스템을 구성했던 오규창을
발탁했다.
그는 햄(Ham)인데다 비범한 기량이 있어 개발에 적임자였다.
나는 박문규에게 총괄을 맡기고 오규창에게 개발을 맡겨 극소수
인원으로 팀을 구성했다.
인원은 비록 적었지만 그 때 구상한 미래의 구도에는 전자전까지
포함하는 등 오늘의 기준에서 보더라도 결코 부끄러운 수준은 아니었다.
나는 미국의 방위산업체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최신 제작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배낭형 무전기 PRC-77 메이커인
멤코(Memcor)사와 발칸포 레이더 VPS-2 메이커인 AEL사에 ADD나
방위산업체의 기술자를 파견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침 과학기술처의 주선으로 국내 민간 업체 요원의 미국 산업체
훈련 프로그램이 있음을 알고 오규창을 멤코에, 금성전기의 하용진을
AEL에 보냈다.
연구 장비를 갖추지 못한 연구실에서 나와 오규창의 것은 물론이고
친구들의 계측장비까지 빌려다 놓고 일을 시작했다.
물론 박문규가 관리해 오던 장비도 활용했다.
그즈음 몇가지 변화가 있었다.
연구소를 ADD에 넘겨준 육군은 연구발전사령부를 발족시켰으며 ADD도
국방부 직속으로 두어서는 안된다는 여론이 안팎에서 일자 결국 특수법인
출연 연구소로 개편하였다.
1971년 11월 박대통령은 긴급 병기 개발 지시를 내렸다.
이른바 "번개 사업"으로 불린 이 지시는 연말까지 소총 기관총 박격포
수류탄 지뢰 로켓 발사기 등의 시제품을 만들라는 것이었다.
물론 통신 분야는 제외되어 있었다.
그러나 우리 팀은 진공관식 신호 변환기(TA-182)를 반도체화해서
ADD 제1호 특허를 얻는 등 시키는 사람이 없어도 스스로 일을 찾아하는
전통을 세우고 있었다.
번개 사업이 막 시작되던 1972년초에 신소장이 사의를 표명했다.
신소장의 후임으로 KIST부소장인 심문택 박사가 새로 부임하여 대수술에
가까운 조직 개편과 인사를 단행함으로써 번개 사업은 본격화됐다.
연구원들은 퇴근도 잊은 채 야전 침대에서 잠을 자가며 불철주야로
연구에 몰두했다.
주어진 과제가 없는 우리 전자 통신팀은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도 없어 우리도 전자 통신 장비를 개발해 보자는 생각에서 군사 규격,
표준(MIL-SPEC/MIL-STD)등 기술 자료 수집에 나섰다.
다행히 미8군의 조달부가 한남동에 있어 각종 군용 통신 장비품에 대한
자료를 비공식으로 입수할 수 있었다.
그 무렵 육군의 통신 장비품 수요에서 시급한 것은 야전 전화기 및
교환기, 야전 전화선 및 케이블, 분대용 무선기였다.
그런데 전화기는 이미 영세업체들이 군납을 하고 있었으며 분대용
무전기는 KIST에서 개발하고 있었다.
당시의 분대용 무전기는 6.25때 미군이 쓰던 진공관식 AN/PRC-6였으며
미군은 이미 폐기해 버려 전쟁이 나면 미군과의 교신은 커녕 아군간에도
통화가 안될 지경이었다.
군의 통신기지창도 기술이나 부품이 없어 속수무책이었다.
당시 미군은 월남전에서 송신기(PRT-4)는 손에 들거나 앞에 매달고
수신기(PRR-9)는 헬멧에 장착하는 분리형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분리형은 작전 운용상 문제가 있어 아예 없애든가 결합형으로
재개발해야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같은 상황을 군에 알려주었더니 분대용 무전기는 절대 필요하고
결합형이어야 한다는 요구를 제기해 왔다.
따라서 나는 먼저 반도체 소자로 소형 경량화하고 회로 방식도 수정, 발진
및 PLL(Phase Locked Loop)방식으로 고도화하였다.
또 채널 간격을 200kHz에서 50kHz로 좁히고 채널수를 43개에서 2백개로
늘려 출력을 증강하는 등 작전 운용 능력을 고도화하기로 했다.
부피도 전화기 정도로 소형화하고 무게도 절반 이상으로 줄였다.
또한 품질 수준은 미 군사 규격을 따르도록 했다.
무전기의 명칭은 기존의 AN/PRC-6을 대체한다는 뜻에서 KPRC-6이라고
했다.
물론 이것은 정식 과제가 아닌 자원 형식의 개발이었다.
따라서 연구비도 지급되지 않았다.
그때 번개 사업의 실무 책임을 맡고 있던 김성진박사는 우리의 자원
연구 개발을 측면에서 지원해 주고 넉넉하지 못한 자신의 연구비의
일부를 선뜻 할애해 주었다.
우리는 우선 무전기의 함체부터 설계해야 했다.
금속에 대한 전문 지식은 없었지만 열 마모 충격에 강하고 경량인
자동차 피스톤이 적합하다는 생각으로 자동차 폐차장에서 헌 피스톤을
사가지고 노량진에 있는 육군연구발전사령부 기계 공작실에 가서
샌드캐스팅으로 무전기의 함체 주물을 만들었다.
거기서 주물을 기계 가공까지 해 왔지만 문제는 부품을 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산 부품 가운데 쓸만한 것이라고는 거의 없는 실정이었으므로
미군 불하품이나 장물이 나도는 청계천 일대의 부품상가가 그 무렵의
유일한 부품과 소재의 공급 원천이었다.
일본에 있는 햄들을 통해 미군 기지 방출 부품을 구해 놓고도 군사
물자라고 하여 통관이 쉽지 않아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이때 앞서 말한 하딘씨의 도움은 결정적이었다.
KPRC-6 개발 계획에 대해 설명을 듣고 그는 미 육군 연구소에서
필요한 부품을 구해 주었다.
아마 수천달러 어치는 족히 되었을 것이다.
이런 노력과 주변의 도움으로 우리는 국산 무전기의 개발에 착수할
수 있게 되었다.
1972년 초 어느날 오원철 수석 비서관이 예고없이 내 연구실을 들렀다.
당시 ADD는 청와대 가까이 있었는데 퇴근길에 불이 켜져 있어 들렀다며
무슨 일을하고 있는지 궁금해했다.
주어진 과제는 없지만 무전기 개발 계획을 추진하고 있으며 목표로 하는
무전기의 성능에 대해 설명했다.
오수석은 서울 공대와 공군의 대선배로서 마침 군장비의 현대화 계획도
있고 해서 나의 무전기 개발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후로부터 오원철 선배는 나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
1972년 2월 마침내 4대의 시제품이 완성되었다.
자체 평가한 성능은 외부에 시범할만했다.
문제는 야전 환경에서 제 구실을 할 것인지 제3자의 평가를 받아 보는
것이었다.
봄이 되면 연례 행사처럼 포항에서는 한미 해병대의 합동상륙 연습이
있었다.
나는 이것을 절호의 기회로 삼고 우리 사업에 자문 위원인 해병대
이재규 중령에게 시제품 4대를 넘겨주고 야전 시험을 의뢰했다.
야전 시험을 마치고 돌아온 무전기들은 페인트가 벗겨지는 등 거칠게
다루어졌으나 무전기로서의 기능은 규격대로 발휘하고 있었다.
해병대의 보고서에는 "진짜 무전기를 처음 써 봤다.
어떤 경우에도 통화가 잘 되고 음성도 명료했다.
무엇보다 중요한것은 미해병대와 교신이 잘되어 협동이 잘되고 국산
무전기에 자부심을 느낀다"는 한 해병의 소감이 포함되어 있었다.
명실공히 KPRC-6의 규격은 한국의 군사규격으로서 품격을 갖춘 최초의
것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모두 74쪽으로 된 이 규격서는 국내외 관련규격및 표준을 원용하고
내용은 적용범위, 적용문서, 요구사항, 검사및 시험, 납품준비, 주기의
6개장으로 구성되었다.
그뒤 이 규격서는 방위산업체들이 따라야 할 율법처럼 인식되었다.
그러나 사실상 가장 큰 난관은 시험평가와 품질보증이었다.
품질보증과 시험평가, 검.교정을 의무화하는 제도와 환경을 조성해 놓지
않고는 연구개발의 성과를 상업화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었다.
군용 무전기는 일반용 통신기기와는 달라 극한의 환경에서도 견뎌내야
한다.
섭씨 영하40도, 영상 60도의 혹한과 혹서를 이겨내야 하고 충격을 주거나
떨어뜨려도 정상으로 작동해야 했다.
물에 담갔다 꺼내도 송수신이 가능해야 했다.
그러나 당시 국내에는 군용 전자 부품및 시스템의 신뢰성을 보증하기
위한 기술 인력및 평가환경이 조성되어 있지 않았다.
따라서 군용 장비개발에 필요한 침수시험, 낙하시험, 진동시험,
모랫바람시험, 염수분무시험 같은 것은 엄두도 못내는 실정이었다.
< 계속 >
(한국경제신문 1996년 9월 10일자).
1970년 8월 국방과학연구소가 의욕적으로 출범하긴 했지만 처음부터
뚜렷한 연구 개발 활동을 보인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당장의 연구 과제가 없더라도 나는 외부 연구소 활용, 기술
자료 확보, 관리 기법 개발, 연구 장비 확보,연구원 유치 및 교육 등에
관심을 갖고 미래에 대비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미국 일본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이스라엘 같은 나라들이
어떻게 무기 체계를 연구개발하고 상품화하고 있는지에 관한 기술 정보
수집에 노력했다.
진리는 상식속에서 발견되고, 기회는 준비된 사람을 찾아오고, 도움은
가까운 곳에서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나의 믿음이다.
마침 ADD에 흡수될 노량진 육군기술 연구소의 장비를 나는 눈여겨봤다.
그 이유는 내가 다닌 서울 공대의 이승원 박민호 이종완 교수님들이
국방과학기술연구소에 겸직으로 계셔 당시의 대학으로는 엄두도 내지 못할
고가의 계측기, 연구 장비를 갖추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시험검사소로 격하되어 퇴색했지만 장비는 쓸만한것이 남아
있으리라 생각했다.
나는 우선 시험검사소에서 장비 관리를 맡고 있던 박문규를 만났다.
그는 한전 산하의 공고를 졸업하고 대학에서 원자력공학을 전공하여
그 무렵 원자력발전소에 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수선한 중에도 성실히 장비 관리를 해 온 그를 보고 나는 이런
사람이야말로 함께 일할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붙들었다.
한편 진공관과 반도체 소자 회로에 능한 사람을 구하던 중 나는
공군사관학교에서 인공위성 신호 관측 시스템을 구성했던 오규창을
발탁했다.
그는 햄(Ham)인데다 비범한 기량이 있어 개발에 적임자였다.
나는 박문규에게 총괄을 맡기고 오규창에게 개발을 맡겨 극소수
인원으로 팀을 구성했다.
인원은 비록 적었지만 그 때 구상한 미래의 구도에는 전자전까지
포함하는 등 오늘의 기준에서 보더라도 결코 부끄러운 수준은 아니었다.
나는 미국의 방위산업체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최신 제작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배낭형 무전기 PRC-77 메이커인
멤코(Memcor)사와 발칸포 레이더 VPS-2 메이커인 AEL사에 ADD나
방위산업체의 기술자를 파견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침 과학기술처의 주선으로 국내 민간 업체 요원의 미국 산업체
훈련 프로그램이 있음을 알고 오규창을 멤코에, 금성전기의 하용진을
AEL에 보냈다.
연구 장비를 갖추지 못한 연구실에서 나와 오규창의 것은 물론이고
친구들의 계측장비까지 빌려다 놓고 일을 시작했다.
물론 박문규가 관리해 오던 장비도 활용했다.
그즈음 몇가지 변화가 있었다.
연구소를 ADD에 넘겨준 육군은 연구발전사령부를 발족시켰으며 ADD도
국방부 직속으로 두어서는 안된다는 여론이 안팎에서 일자 결국 특수법인
출연 연구소로 개편하였다.
1971년 11월 박대통령은 긴급 병기 개발 지시를 내렸다.
이른바 "번개 사업"으로 불린 이 지시는 연말까지 소총 기관총 박격포
수류탄 지뢰 로켓 발사기 등의 시제품을 만들라는 것이었다.
물론 통신 분야는 제외되어 있었다.
그러나 우리 팀은 진공관식 신호 변환기(TA-182)를 반도체화해서
ADD 제1호 특허를 얻는 등 시키는 사람이 없어도 스스로 일을 찾아하는
전통을 세우고 있었다.
번개 사업이 막 시작되던 1972년초에 신소장이 사의를 표명했다.
신소장의 후임으로 KIST부소장인 심문택 박사가 새로 부임하여 대수술에
가까운 조직 개편과 인사를 단행함으로써 번개 사업은 본격화됐다.
연구원들은 퇴근도 잊은 채 야전 침대에서 잠을 자가며 불철주야로
연구에 몰두했다.
주어진 과제가 없는 우리 전자 통신팀은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도 없어 우리도 전자 통신 장비를 개발해 보자는 생각에서 군사 규격,
표준(MIL-SPEC/MIL-STD)등 기술 자료 수집에 나섰다.
다행히 미8군의 조달부가 한남동에 있어 각종 군용 통신 장비품에 대한
자료를 비공식으로 입수할 수 있었다.
그 무렵 육군의 통신 장비품 수요에서 시급한 것은 야전 전화기 및
교환기, 야전 전화선 및 케이블, 분대용 무선기였다.
그런데 전화기는 이미 영세업체들이 군납을 하고 있었으며 분대용
무전기는 KIST에서 개발하고 있었다.
당시의 분대용 무전기는 6.25때 미군이 쓰던 진공관식 AN/PRC-6였으며
미군은 이미 폐기해 버려 전쟁이 나면 미군과의 교신은 커녕 아군간에도
통화가 안될 지경이었다.
군의 통신기지창도 기술이나 부품이 없어 속수무책이었다.
당시 미군은 월남전에서 송신기(PRT-4)는 손에 들거나 앞에 매달고
수신기(PRR-9)는 헬멧에 장착하는 분리형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분리형은 작전 운용상 문제가 있어 아예 없애든가 결합형으로
재개발해야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같은 상황을 군에 알려주었더니 분대용 무전기는 절대 필요하고
결합형이어야 한다는 요구를 제기해 왔다.
따라서 나는 먼저 반도체 소자로 소형 경량화하고 회로 방식도 수정, 발진
및 PLL(Phase Locked Loop)방식으로 고도화하였다.
또 채널 간격을 200kHz에서 50kHz로 좁히고 채널수를 43개에서 2백개로
늘려 출력을 증강하는 등 작전 운용 능력을 고도화하기로 했다.
부피도 전화기 정도로 소형화하고 무게도 절반 이상으로 줄였다.
또한 품질 수준은 미 군사 규격을 따르도록 했다.
무전기의 명칭은 기존의 AN/PRC-6을 대체한다는 뜻에서 KPRC-6이라고
했다.
물론 이것은 정식 과제가 아닌 자원 형식의 개발이었다.
따라서 연구비도 지급되지 않았다.
그때 번개 사업의 실무 책임을 맡고 있던 김성진박사는 우리의 자원
연구 개발을 측면에서 지원해 주고 넉넉하지 못한 자신의 연구비의
일부를 선뜻 할애해 주었다.
우리는 우선 무전기의 함체부터 설계해야 했다.
금속에 대한 전문 지식은 없었지만 열 마모 충격에 강하고 경량인
자동차 피스톤이 적합하다는 생각으로 자동차 폐차장에서 헌 피스톤을
사가지고 노량진에 있는 육군연구발전사령부 기계 공작실에 가서
샌드캐스팅으로 무전기의 함체 주물을 만들었다.
거기서 주물을 기계 가공까지 해 왔지만 문제는 부품을 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산 부품 가운데 쓸만한 것이라고는 거의 없는 실정이었으므로
미군 불하품이나 장물이 나도는 청계천 일대의 부품상가가 그 무렵의
유일한 부품과 소재의 공급 원천이었다.
일본에 있는 햄들을 통해 미군 기지 방출 부품을 구해 놓고도 군사
물자라고 하여 통관이 쉽지 않아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이때 앞서 말한 하딘씨의 도움은 결정적이었다.
KPRC-6 개발 계획에 대해 설명을 듣고 그는 미 육군 연구소에서
필요한 부품을 구해 주었다.
아마 수천달러 어치는 족히 되었을 것이다.
이런 노력과 주변의 도움으로 우리는 국산 무전기의 개발에 착수할
수 있게 되었다.
1972년 초 어느날 오원철 수석 비서관이 예고없이 내 연구실을 들렀다.
당시 ADD는 청와대 가까이 있었는데 퇴근길에 불이 켜져 있어 들렀다며
무슨 일을하고 있는지 궁금해했다.
주어진 과제는 없지만 무전기 개발 계획을 추진하고 있으며 목표로 하는
무전기의 성능에 대해 설명했다.
오수석은 서울 공대와 공군의 대선배로서 마침 군장비의 현대화 계획도
있고 해서 나의 무전기 개발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후로부터 오원철 선배는 나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
1972년 2월 마침내 4대의 시제품이 완성되었다.
자체 평가한 성능은 외부에 시범할만했다.
문제는 야전 환경에서 제 구실을 할 것인지 제3자의 평가를 받아 보는
것이었다.
봄이 되면 연례 행사처럼 포항에서는 한미 해병대의 합동상륙 연습이
있었다.
나는 이것을 절호의 기회로 삼고 우리 사업에 자문 위원인 해병대
이재규 중령에게 시제품 4대를 넘겨주고 야전 시험을 의뢰했다.
야전 시험을 마치고 돌아온 무전기들은 페인트가 벗겨지는 등 거칠게
다루어졌으나 무전기로서의 기능은 규격대로 발휘하고 있었다.
해병대의 보고서에는 "진짜 무전기를 처음 써 봤다.
어떤 경우에도 통화가 잘 되고 음성도 명료했다.
무엇보다 중요한것은 미해병대와 교신이 잘되어 협동이 잘되고 국산
무전기에 자부심을 느낀다"는 한 해병의 소감이 포함되어 있었다.
명실공히 KPRC-6의 규격은 한국의 군사규격으로서 품격을 갖춘 최초의
것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모두 74쪽으로 된 이 규격서는 국내외 관련규격및 표준을 원용하고
내용은 적용범위, 적용문서, 요구사항, 검사및 시험, 납품준비, 주기의
6개장으로 구성되었다.
그뒤 이 규격서는 방위산업체들이 따라야 할 율법처럼 인식되었다.
그러나 사실상 가장 큰 난관은 시험평가와 품질보증이었다.
품질보증과 시험평가, 검.교정을 의무화하는 제도와 환경을 조성해 놓지
않고는 연구개발의 성과를 상업화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었다.
군용 무전기는 일반용 통신기기와는 달라 극한의 환경에서도 견뎌내야
한다.
섭씨 영하40도, 영상 60도의 혹한과 혹서를 이겨내야 하고 충격을 주거나
떨어뜨려도 정상으로 작동해야 했다.
물에 담갔다 꺼내도 송수신이 가능해야 했다.
그러나 당시 국내에는 군용 전자 부품및 시스템의 신뢰성을 보증하기
위한 기술 인력및 평가환경이 조성되어 있지 않았다.
따라서 군용 장비개발에 필요한 침수시험, 낙하시험, 진동시험,
모랫바람시험, 염수분무시험 같은 것은 엄두도 못내는 실정이었다.
< 계속 >
(한국경제신문 1996년 9월 1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