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교는 고대 중국의 신선사상을 기반으로 자연발생한 종교다.

기원전 3세기께 발생한 신선설에 역리 음양 오행 참위 의술 점성등의
갖가지 법술과 무속신앙이 보태져 이루어진 이 종교는 부노장생을
목적으로 삼기때문에 내세가 아닌 현세의 길복을 추구하는 것이
특징이다.

단군의 건국신화부터 산악신앙 신선사상과 직결돼 있는 우리나라는
고대에 이미 도교를 수용할 수 있는 토양이 마련돼 있었다.

"삼국유가"에는 고구려말기인 영유주7년 (624)에 당 고조가 고구려에
도사를 파견해 "천존상"을 보내고 "도덕경"을 강론하게 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그뒤 연개소문이 당에서 8명의 도사를 데려다가 불교사찰을 도관으로
삼아 국가의 복을 비는등 도교를 불교 유교보다 우위에 두는 과감한
정책을 펴기도 했다.

그결과 고구려인들이 다투어 쌀 닷되를 내고 입교하는 도교의 일파인
"오두미도"를 숭상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신라에서도 말기에는 당에 유학했던 인물들이 수련적 도교를 배워가지고
돌아와 그들에 대한 신비스런 이야기들이 전한다.

당나라에 유학했던 최승우 김가기등을 3년동안의 수련끝에 단을
이룩하는 독도의 경지에 이르러 김가기는 당에서 대낮에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불교국가였던 고려에도 국가의 재앙을 막고 복을 빌기 위해 하늘
따 산악에 제사지내는 "제초"는 여전히 계속돼 복원관이란 도관까지
지어놓고 빈번하게 행해졌다.

유교국가인 조선에 들어와서도 1518년에야 도교의 제사를 관장하던
소격서가 유림의 반대로 혁파됐다.

그러나 소격서 혁파후에도 도교의 재초행사는 마니산등지에서 여전히
계속됐고 민간에서는 도교의 수련법이 건강증진법의 하나로 퇴계나
율곡같은 유학자들에게까지 널리 이용됐다.

도교가 우리의 정치 문화 사상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그런데도 학계의 도교연구가 미미하고 유교나 불교처럼 도교가 하나의
교단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은 도교사상에 아마 지나치게 신비적인
요소가 많은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대전대가 도교대학원을 신설키로 했다고 한다.

역학 단학 풍수지리 등 3개분야를 전공하는 대학원이란다.

관상 수상 점술 무속 등을 강의하는 1년단기과정도 설치해 무속인
등의 지원을 받겠다는 타산적 계획도 관심꺼리다.

도교나 무속 등을 현대적시각을 통해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동시에
학문적으로 체계화한다는 설립취지에 굳이 반대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역학 단학 풍수지리에서 신비적요소를 제거하면 그것은 역학
단학 풍수지리가 아니다.

또 어떤 교수들이 강의를 맡을 것인지도 의심스럽다.

근래에 그릇된 방향에서 관심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는 풍수지리라
점술 등에 제동을 걸수 있는 대학원이 생겨나야 한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8월 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