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유 중견그룹 L회장은 최근 동남아로 공장을 이전키로 결정하고
후련해 했다.

"이젠 마음 편하게 살 수 있을 것 같다.

적어도 여기가서 굽신, 저기가서 굽신할 필요가 없게 됐다.

이것저것 설명하고 사정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

식품업을 영위하는 대기업 C사는 연초에 세워놨던 국내 공장 신증설
계획을 전면 백지화했다.

"한국에서 제조업을 해 돈을 벌 수 없을 바에야 왜.."

D그룹의 Y회장은 세계경영을 기업의 생존전략으로 자리매김 한다.

"밖으로 나가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나.

어쩔 수 없이 나가는 거요"

한국의 기업들은 지금 후세의 경제사가들이 민족의 대이동에 비유할
지도 모를 정도로 너도나도 밖으로 나가고 있다.

일렬종대로 집단을 지어 해외진출을 결행하고 있다.

세계화라고 해도 좋고, 국제화라 해도 좋고, 개방화라 해도 좋다.

어쨌든 이런 "XX화"의 초기효과는 "기업의 한국 대탈출"로 나타나고
있다.

세계화 시대 기업의 해외진출이 뭐 그리 대수로운 일이겠느냐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모든 공장이 해외로 나가 있고 국내에는 기껏해야 본부나
판매망만을 가지고 있다면 아무리 "현대가 대단하고, 삼성이 유명하다"
하더라도 뭔가 허전하다.

그게 바로 산업공동화다.

엄밀하게 말하면 제조업 공동화다.

물론 한 나라가 살아가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다.

관광수입에 의존해서, 또는 낙농국가로서, 아니면 중계무역만을 해서도
잘사는 나라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한국의 상황은 다르다.

이렇쿵 저렇쿵 떠들지만 그래도 한국은 "물건 만드는 것"에 가장
잘 특화돼 있다.

더구나 제조업을 지키지 않으면 지난 80년대 초반 미국의 경우보다도
더 심각한 상황에 빠질 게 분명하다.

당시 미국의 레이건 행정부는 "강한 미국의 재현"을 위해 "비싼 달러"
정책을 견지했고 이에 따라 많은 미국 기업들이 중남미와 아시아 등지로
생산거점을 옮겨 갔다.

기업들이 해외로 나가자 국내 공급력이 저하됐고 미국은 그만큼을
외국으로부터 수입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됐다.

그렇지 않아도 만성적자에 허덕이던 미국의 적자 규모가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난 건 너무나 당연했다.

반년간 국제수지적자가 1백억달러에 달하는 작금의 우리 현실에서
기업의 해외탈출은 80년대 초반 미국과 꼭 닮아 있다는 점에서 우려할
만하다.

경상흑자를 배경으로 동남아등지에 생산기지를 옮겨 소위 수평분업
체제를 갖추는 일본 기업의 해외투자와는 사정이 다르다.

그렇다면 기업들의 한국 탈출을 막을 길은 없는가.

있다.

문제에 대한 정확한 인식에서부터 출발하면 답은 나온다.

"선진국에 비해 금리는 배이상 비싸고, 임금은 생산성에 비해 30%나
높으며, 공장용지는 한평에 수십만원씩이나 하고, 가는 곳마다 막히는
길에 물류비는 하루가 멀게 늘어나고 있는 데 어떻게 공장을 하란
말이냐"고 기업인들은 지적한다.

맞는 말이다.

경제적 합리성의 세계에서 보면 한국기업의 해외탈출도 "코스트
대응형"에 다름아니다.

고비용 구조를 깨버리면 문제는 해결된다.

그러나 이런 것들 대부분이 지난 50년간 쌓여온 구조적 적폐가 아닌가.

하루 이틀에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당장이 급한데 시간을 두고 개선해 나가야할 과제들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또 이런 의문도 든다.

금리가 낮다고는 하지만 일본은 우리보다 인건비도 땅값도 싸지
않은데 지금도 어떻게 섬유제품을 수출하고 있는지.

이렇게 보면 고비용구조 말고도 우리는 문제 해결을 위한 또 다른
인식이 필요한 건 아닐까.

사실 한국에서는 "더 이상 사업할 맛도 나지 않고 기업할 분위기도
아니다"라는 메세지를 전하는 기업인들이 많다.

"내가 반도체 공장을 짓는 나라에 가면 하시라도 그나라 대통령을
만날 수 있다.

예약 같은 것도 필요 없다.

그러나 한국에선 대통령은 커녕 장관한번 만나보기도 힘들다"

(A사 K회장).

"영국에서 공장 준공을 할때는 엘리자베스 여왕까지 참석했다.

한국에선 어떤가.

어느 장관이라고 할 것도 없이 주무장관까지도 개별 기업 공장

기공식이나 준공식 같은 행사에는 참여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정하고 있다지 않은가" (S사 S사장).

"한국에선 뭔가 할라치면 예외없이 특혜로 몰아 붙인다.

우선 언론이 그렇게 나오고 관리도 여기에 영합한다.

삼성이 제 돈을 들여 자동차 사업을 해도, 현대가 제철사업에
진출한다고 해도, LG가 PCS사업을 따도, 모두들 특혜라고 하는데
그게 왜 특혜인가.

국민정서를 무시할 수 없다고들 하지만 그렇다면 기업정서는 왜
생각해주지 않는가" (D그룹 P사장).

김영삼 대통령은 지난해 유럽 각국을 순방하고 돌아와 "외국 나가면
한국 대통령으로서 각별한 대접을 받는데 국내에 들어오면 오히려 그만한
대접을 못받는 것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 심정을 기업 입장에서 한번 역지사지해보면 어떨까.

(한국경제신문 1996년 8월 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