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천서 < 한국 어문학회 이사 / 전 미원 사장 >

"한글전용이 곧 애국이다"라는 사회분위기를 조성하여 수백년 사용해온
한자를 배척하고 한글만으로 국어를 표기토록 한 일은 정부가 해낸 "문자
쿠데타"라고 할 수 있다.

해방이후에 일어난 이 쿠데타는 세계문화패권을 노린 맥아더군정의 문자
개혁압력에 맞서 일본이 끝내 불발시킨 소위 운동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

문맹이 많던 해방당시, 이 조치로 일단은 읽고 씀이 쉬워져 서구화(특히
문자의 기계화)와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필요하겠다는 평가가 없지는
않았으나 반면 동명이인과 동음이지의 발생으로 불편을 야기하고 관념전달이
많은 학술저서의 이해를 어렵게 하였다.

더구나 전통문화의 단절을 재촉하는 작용을 해 우리 사회를 지탱해온
전통적인 가치의 빛을 잃게 하였다.

또 문화의 단절이 국민의 정신적 문화적 공백을 낳고 그 공백은 자주적인
고급문화 대신에 특히 외부로부터 말초신경 중심의 저질, 천민문화로
채워지는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다시 말해 중심이 허약한 틈에 악화가 양화를 밀어내는 그리샴의 법칙이
도처에서 위력을 발휘하게 된 것이다.

"한글전용".

"한자배척"이 초래한 부작용, 이를테면 어휘의 고갈화와 원시화, 뜻의
애매모호성, 학습효과의 저하, 지력의 감퇴, 전통문화 특히 선비문화의
실종, 가치관의 혼란등이 일과성이거나 한시적인 문제도 아니었다.

한글전용론자들이 한자어휘를 한글신조어로 쉽게 바꿀수 있다고 자신하였던
것은 큰 착각이요 오만이었다.

한자문화권에 속한 우리말이 그 70%가 한자어(문명어는 거의 전부)인 점,
문명이 한발 앞선 다른나라 한자문화권에서 이미 많은 문명어를 차입하여
우리말화한 사실, 앞으로 필요한 신조어를 만들려면 조어력이 뛰어난 한자
지식을 활용해야 하는 국어의 조건에 대해 깊은 통찬이 부족했다.

그때 국어에 대하여 좀더 경외심을 갖고 이 문제에 대처하였더라면 한글
전용까지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이점에서 일본과 크게 달랐다고 생각한다.

우리 국어의 구조적특성이나 역사성으로 보아 한글전용으로는 국어교육의
능률 인성교육 사고력개발 지력향상 문화유산의 주인의식을 기르는데
역부족임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한자문맹화 국어교육이 장기적으로는 14억인구의 "한자경제권"에서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한민족을 고립화시키는 요소가 짙은 것이었다.

한글과 한자(표의문자)의 조합과 상호보완성으로 세계 제일이라던 우리
국어를 반신불수로 만들어 억지 국어교육을 하면서 영어만 가르치면 된다고
믿는 것은 큰 잘못이다.

오랜 한글전용실시로 그 폐단이 분명히 드러나자 이 법을 빨리 폐기해야
한다는 "언중"의 여론이 커져가고 국어전통성 회복의 희망이 보이는 터에
정부당국자는 어문정책의 일관성을 구실로 망국적인 한글전용법에 안주
하려는 감을 강하데 풍기고 있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과연 한글전용정책이 누구를 위해 무엇때문에 존속하는 것인지 냉철하게
다시 한번 생각했으면 한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7월 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