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욱 < 한국이동통신 사장 >

나는 지금 나를 흔들어 깨우는 수많은 기억과 회한의 길목에서 잠시
망설인다.

우리나라 정보통신의 역사를 새롭게 돌아본다는 이 긴 여행을 떠나기 앞서
뭔가 빠뜨린 것은 없는지 한번 더 돌아보자는 생각에서이다.

이런 나의 우려는 과학기술과 관련산업의 발달은 그 사회 전반과의 유기적
인 관련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데에 모아졌다.

곧 인간과 과학의 만남은 단순히 재능을 가진 한 개별적인 존재와 과학
이라는 특별한 가치를 지닌 패러다임과의 만남이 아니라는 것이다.

앞서 예를 든 전파전쟁의 경우처럼 인간과 과학의 만남은 그 시대의
정치적 역사적 사회적 배경같은 총체적인 문화적 상황과의 상호 관련없이는
이해되거나 해석될 수 없다.

왜냐하면 과학이란 하나의 개별문화가 아니라 그 시대 문화의 총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학 기술의 진보를 그 사회 전반의 풍토와 욕구에 관한 종합적인
이해없이 단선적으로 늘어놓을 때 과학을 물질적 풍요나 이윤 추구의 산물
정도로 인식하게 만든다.

또 때때로 과학의 역사가 한 과학기술자의 에피소드 정도로 전락되는
경우도 바로 이런 시각에 기인한다.

여기서 나는 내 개인적인 체험을 회고하기에 앞서 19세기 중엽 이후 한국과
일본이라는 동양의 두 나라가 서구 열강의 개방 압력에 대해 당시 근대적인
의미의 통신기술과 관련산업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실용화해 나갔는지를
견주어 보고자 한다.

바로 여기에서 좁게는 극일의, 넓게는 세계화의 타산지석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무선통신의 역사는 1864년 영국의 물리학자 제임스 클라크 맥스웰이
전자기파의 존재를 이론화한 것에서 발단이 되어 독일의 물리학자 헤르츠의
실험에 의해 전자기파의 존재를 실증한 1888년을 기점으로 삼는다.

그뒤 많은 사람들의 연구와 실험을 종합해서 이탈리아의 청년 마르코니는
1895년 12월, 2.5km의 거리에서 무선 송수신에 성공함으로써 "통신 거리의
증대"라는 무선통신의 혁신적인 발명에 성공했다.

이같은 사실이 당시 영국의 신문에 보도되자 영국에 대형 군함 건조를
발주하고 이를 감리하기 위해 주재해 있던 일본의 군인들은 크게 주목했다.

그리고 1899년 일본 정부는 주영 일본공사관으로부터 대략 다음과 같은
"무선전신에 관한 보고"를 접수하기에 이른다.

"마르코니의 무선전신이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 성능이 양호한
것으로 입증되었다. 아직 완전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근년에 보기 드문
대발명으로 미래에 큰 편익이 될 것으로 식자들은 인정하고 있다. 무선전신
을 즉각 군용으로 쓸 수 있는지에 관해서는 확신할 수 없을지라도 해상에서
의 통신에 이점이 많고 적군의 동정이나 우군의 정보 또는 명령을 전달하는
데에 편익이 클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전신학자는 물론 해군에서도 이에
대한 연구 개발에 나서길 바란다"

마르코니의 무선전신 실험 결과의 과정을 상세히 소개하고 그 이용 가치
까지 열거한 한 일본 해군 무관의 상세한 조사 보고와 이에 공감한 공사의
의견을 첨부하여 보내온 이 보고서는 무선의 가치에 대해 반신반의하던
일본 해군에 큰 자극을 주었다.

그러나 무선의 실용성에 관한 의견은 분분했다.

몇몇 뜻있는 사람들이 어렵게 교섭한 끝에 해군 소좌인 소도나미
(외파내장길)는 체신성 전기시험소의 마쓰요연구원, 동북대학의 기무라교수
등 무선 전문가로 조사 연구팀을 구성했다.

한편 1899년 6월 미국 주재 일본 장교가 보낸 한 의견서는 일본 내각을
술렁이게 했다.

그 내용은 영국에서 개량 실험을 진행하고 있는 무선전신은 장래 반드시
크게 활용될 것이므로 지금 일본은 청나라와 한국에서의 무선전신 시설
설치권을 획득해 놓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의견은 즉시 채택되었으며 내각회의의 찬동을 얻어 급기야 일본은
외교 교섭에 나서게 되었다.

그러나 그 교섭 결과는 부정적이었다.

당시 청나라는 1860년 동치중흥으로 군수공업의 근대화를 추진해 오긴
했지만 아직 여기에 응할 준비가 전혀 없었으며 필요한 경우 일본 기술자의
초빙을 고려하도록 이야기가 되었으나 결과를 맺지 못했다.

한편 우리나라는 당시 주한 공사였던 하야시가 교섭에 나섰지만 무선전신
시설을 독자적으로 설치하겠다고 회답함으로써 일본의 제의를 거절했다.

이로써 야심에 찬 일본의 청과 한국에 대한 무선전신 시설 설치권 획득
기도는 소득 없이 끝났다.

그러나 이같은 일본의 무선전신에 관한 관심과 열의는 무선전신 기술
확보와 실용화에 상당한 진전을 보임으로써 뒷날 대륙 침략의 발판이 된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1900년 2월 일본해군은 함정과 함정간의 첫 시험 통신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으며 이는 그해 5월, 해군의 대훈련으로 이어졌다.

일본의 메이지 천황이 참석한 이 훈련에서 일본 해군은 각 함정간의
송수신의 실연을 천황에게 시범했다.

당시 최대 통달 거리는 34 가 넘었으며 전파가 함내의 화약에 미치는 영향
이나 마스트 등에 관한 영향 평가도 함께 이루어졌다.

이 시범에 앞서 말한 세 전문가가 기여한 것은 물론이었다.

이처럼 연구 시험 평가를 거듭한 일본은 1901년, 무선전신기를 공식 병기로
채택하였으며 이것이 이른바 메이지 34년이라는 연호에 따라 명명한 "34식
무선전신기"이다.

한편 일본은 국제 정세가 긴박하게 돌아감에 따라 통신 요원의 양성은 물론
무선전신기의 국산화와 개량에 열을 올렸다.

이에따라 일본의 기술자들은 무선용 자료 구입과 무선전신의 사정 시찰을
위해 미국과 유럽에 급파되었다.

당시 미국은 새로운 문물이면 무엇이든 자유롭게 보여줄 만큼 자신만만해
있었다.

어느 나라든 그것을 모방해서 완성시킬 시점이면 미국은 한발 더 진보해
있을 것이므로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보여준다는 자세였다.

그러나 당시 미국의 무선전신은 이렇다 할 만한 성과가 없었다.

유럽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영국에서는 마르코니회사가 캐나다와 직접 통신을 하기 위해 건설중인
시설을 은밀히 관찰할 수 있었을 뿐이고 독일과 프랑스도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구미 시찰을 마치고 돌아온 일본의 무선 전문가들은 34식 무선전신기의
개량 연구에 착수했다.

해군 병기창에 작업장을 설치하고 기능공 약 60명을 전속으로 배치하는
한편 외국에서 모아온 측정 기구로 시험소와 기계제작소를 신설했다.

한편 오사카 박람회를 통해 무선전신기 납품업자도 선정했다.

그리고 무선전신기 산업의 육성을 위해 해군의 실험 결과를 알려주고
제작에 성공하면 막대한 물량의 주문을 약속했다.

여기서 개량, 국산화한 무선기가 "36식 무선전신기"이며 1903년, 해군은
이를 공식 병기로 채용하였다.

민비 시해 사건에 이어 아관파천이 일어난 이듬해인 1897년, 우리나라는
대한제국으로 새 체제를 갖추긴 했지만 러시아와 일본의 날카로운 대립의
틈바구니에서 국정은 파행을 거듭하였다.

특히 러시아는 시베리아 철도가 만주를 통과하는 권리를 획득한데 이어
만주에 철도 부설권을 얻는 등 극동 지역에서 눈에 띄게 자신들의 세력을
강화해 나갔다.

러시아의 세력 침투에 가장 큰 불안을 느낀 일본은 몇 차례에 걸쳐 러시아
와 협상을 벌이며 서로의 국익에 손해가 없도록 타협해 나갔다.

그러나 청에서 일어난 의화단의 난으로 공동 출병한 러시아가 군대를
철수시키지 않고 만주를 영구히 점령하려는 태도를 취하자 러시아와 일본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수차례에 걸친 협상을 벌였으나 결국 일본은 1904년2월, 여순에 대한
기습 공격을 단행함으로써 두 나라는 전쟁 상태에 들어갔다.

그 피해는 곧바로 국외 중립을 선언한 한국에도 미쳤다.

일본은 러일전쟁을 눈앞에 두고 우리나라의 통신권을 차례로 강탈해 갔으며
1904년2월에는 한일의정서를 통해 한국의 독립과 영토 보전을 빌미로
정치적 군사적 간섭을 합리화하였다.

한편 러일전쟁은 세계 여러 나라의 예상을 뒤엎고 일본의 연승으로 시종
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일본은 이미 무선통신에 의해 조기 경보
체제는 물론 전파 방해 능력까지 갖추고 있었다는 점이다.

일본이 러일전쟁의 승리를 전파전의 승리로 해석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러일 관계가 악화된 1903년 겨울, 일본 해군은 러시아와의 전쟁에 대비해
보유 함정에 국산화한 36식 무선전신기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이 작업은 이듬해 초까지 계속되었으며 1904년2월3일, 여순항에 정박중인
러시아 순양함대가 출항했다는 정보를 얻을 때에는 일본 연합 함대의
모든 함정은 36식 무선전신기를 갖추고 출격의 때를 맞출 수 있었다.

그리고 1905년5월, 러시아와 일본의 해전에서 일본은 커다란 무선전신의
성과를 올릴 수 있었다.

일본의 36식 무선전신기의 확실한 통신 거리는 80해리로 알려졌으나 때로는
1천해리에서 송수신이 되기도 했다.

순찰 순양함으로부터 들어온 러시아 함대의 이동 속도와 방향 등의 정보는
일본 함정의 무선전신기를 타고 속속 사령부로 입수되었다.

한 함정으로부터 하루에 1백통이 넘게 날아오는 전문을 통해 전황의 추이는
손바닥처럼 훤히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의 함대 사령부가 이를 토대로 신속한 명령을 내릴 수 있었음은 물론
이다.

러일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는 국제적으로 일본이 한국에서의 보호조치를
취하는 것을 승인한다는 포츠머스 강화조약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로써 일본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한국을 식민지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의 무선전신기의 도입과 개발사는 글머리에서 얘기한 과학 기술과
관련산업의 발달은 그 사회 전반과의 유기적인 관련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명제에 대한 실례이지만 우리를 괴롭히는 질문은 여전히 살아 있다.

그때 우리는 어디서 무엇을 했는가? 물론 한국의 과학 기술 분야에
선각자들이 없었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이기백 교수의 "한국사 신론"에는 19세기의 개화사상은 부국강병의 실효를
거두기 위해 서양의 새로운 기술의 도입을 적극 촉진하였으며 가장 우선이
된 대상도 무기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두 차례의 양요를 거치면서 신식 전함과 대포를 제작했으며 개항
뒤에는 신식 무기의 도입과 함께 신식 군사훈련을 실시하기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서양과 비슷한 시기에 전화기가 도입됐으며 유무선 설비도 갖추어졌다는
것쯤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그 선각자 중에 누가 언제 어떻게 어떠한
기술을 이어받고 개발하여 국가 안보에 기여하고 오늘날 우리의 과학 기술과
산업에 어떤 유산을 주었는지에 대한 자료는 아쉽게도 찾을 수 없었다.

이순신 장군의 "가짜 총통"이외에는 말이다.

나는 이러한 질곡의 역사를 한탄하며 조상 탓이나 하는 책임론을 펴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 단절된 역사를 통해 우리의 오늘을 되돌아보자는 것이다.

"산업화에는 뒤졌지만 정보화에는 앞서가자"는 최근의 구호에 걸맞게
과연 우리는 할 일을 다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는 것이다.

( 계속 )

(한국경제신문 1996년 7월 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