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로부터 저주에 가까운 협박을 들은 김문상이 벌벌 떨리는 가슴을
안고 집으로 돌아와 끙끙 앓아누웠다.

원앙이 가사의 말을 듣지 않으면 원앙뿐만 아니라 김문상 자신도
어떤 해를 입을지 알 수 없었다.

김문상의 아내는 염려스런 얼굴로 돌아누운 김문상의 어깨를 흔들며
물었다.

"왜 그러세요? 도대체 가사 대감이 뭐라 그랬길래 그리 사색이 되어
드러누워 있어요?"

"아니야, 아무 것도 아니야. 원앙의 마음을 아뢰었더니 가사 대감이
역정을 좀 내었을 뿐이야"

김문상은 자신의 불안한 마음을 아내에게 털어놓을까 하다가 그만두고
벌떡 몸을 일으켜 원앙을 만나러 나갔다.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원앙을 설득해보려고 하였지만, 원앙은 대부인
곁으로 와서 그런지 이제는 분명하게 자신의 의사를 밝히기까지
하였다.

"가사 대감이 나를 위협하고 저주한다 해도 소용 없어요.

나는 다른 남자에게 마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여차하면 혼인을 하지
않고 혼자 살 각오도 되어 있으니까요.

그러니 오빠도 아무 염려 마세요.

까닭 없는 저주는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참새와 같은 거예요.

참새는 그러다가 그냥 날아가버리잖아요.

아무튼 이제는 이 모든 일을 대부인 마님께 말씀드려야겠어요.

오빠도 나랑 같이 대부인 마님께로 가요"

"근데 대부인께서 너의 이야기를 듣고는 너보고 가사 대감에게로 가라고
한다면 어떡할 거야?

대부인 말씀이면 너도 어쩔 수 없이 순종할 거야?"

"일단 대부인 마님께 함께 가서 뭐라 말씀하시는지 들어봐요"

원앙이 말끝을 흐리고는 일어나 방을 나가자 김문상은 아직도 한가닥
기대를 안고 원앙을 따라갔다.

대부인의 방으로 가니 여러 부인들이 담소를 하며 둘러앉아 있었다.

원앙이 그 부인들을 재빨리 둘러보았다.

다행히 형부인은 보이지 않았다.

원앙은 무조건 대부인 앞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무슨 일이냐? 집에 잘 다녀왔다고 인사를 올린지 반나절도 지나지
않았는데"

대부인이 원앙을 따라온 김문상을 건너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원앙은 형부인이 자기를 찾아와서 한 이야기부터 조금 전에 가사가
퍼부은 저주에 이르기까지 자초지종을 다 고해바쳤다.

"저는 마님께서 서방정토로 가실 때까지 오로지 마님만 섬기겠어요.

마님이 돌아가신 후에도 마님의 혼백을 달래드리기 위해 머리를 깎고
중이 되겠어요.

이렇게 말이에요"

그러면서 언제 준비했는지 옷 소매에서 가위를 꺼내더니 자기 머리를
한줌이나 싹독 잘라버렸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7월 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