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호위서"라고 했던가.

동물의 제왕인 범도 권위를 잃으면 생쥐가 된다는 말이다.

요즘 재정경제원과 공정거래위원회가 바로 그 짝이다.

막강한 "힘"이 "돈"에 휘둘려 놀아난 것으로 드러났으니 권위는 고사하고
한낱 세력집단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하늘을 찌를 것 같던 위세는 간데 없고 꽁지 빠진 장닭 마냥 잔뜩 풀이
죽었다.

공무원의 부정사건이라는게 기본적으로 개인의 문제이긴 하다.

돈을 주어도 거부했다면, 청백리였다면, 공명정대한 인품이었다면..

물론 그렇다.

관리를 "사모 쓴 도둑"이라고 내놓고 말하던, "권력이 바로법"이던 그
옛날에도 청백리의 아름다운 족적을 남긴 성현은 즐비하다.

제아무리 질긴 연줄을 동원해도,억만금을 들이밀어도 받지 않는다면 이런
일이 생겼겠느냐는 데야 할 말이 없다.

하지만 나는 개인의 인품은 차치하고 싶다.

서민 처지로는 꿈도 못 꿀 거액의 뇌물을 받고 잡혀 들어간 인사들을
두둔하려 해서가 아니다.

"그럴 사람들이 아닌데..."하는 심정적 동정에서도 아니다.

개인의 질보다는 원천적인 "제도"의 문제가 워낙 심각하기 때문이다.

바로 행정규제다.

너무 많고, 지나치게 복잡하고, 그나마 애매하게 돼 있는 규제들이 부패를
용인하는 수준을 넘어 제도적으로 부패를 불러오게끔 돼 있다는 말이다.

사사건건 관리의 "도장"을 받아야 하고, 그것도 해주고 싶으면 해주고
싫으면 관둘수 있게 돼 있으니 "성의"를 표시하지 않을 재간이 없다.

어느 기업인이 말하는 현실을 보자.

수도권에 공장을 하나 지으려고 했단다.

큰 기업에서 일한 경력도 있고 해서 직접 뛰었더니 "이건 사람이 못할 짓"
이라는게 그의 결론이다.

법인을 세우기 시작하면서 공장을 준공받을 때까지 적용되는 법령이
무려 37개, 구비서류는 220종이나 되더란다.

"도장을 백개나 받았다"는 그의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환경부와 통상산업부가 제일 높은 곳인 줄 알았는데 소방서와 군청이
더 무섭더라는게 그의 말이다.

그를 심장병까지 얻게 한 건 서류가 많아서가 아니다.

뚜렷한 설명도 없이 툭하면 반려시킨다는 대목이었다.

고쳐서 가져가도, 또 다른 곳을 보완해 오라며 퇴짜를 놓는데 "정말
때려 치우고 싶었다"는게 그의 말이다.

그는 짜증을 내다 못해 병까지 얻었다.

백개의 도장을 받는 과정에 "봉투"가 몇개나 필요했는지는 상상에 맡길
일이다.

그 많은 규제들이 어떻게 돼 있길레 공무원들이 저렇게 할 수 있었는지는
지난달 청와대에서 열린 회의(국가경쟁력기획단 회의)에서도 여실히 지적
됐다.

숙박업소를 허가해줄 때 적용하는 시설기준은 이렇다.

"적당한 면적의 욕실과 충분한 침구, 적당한 면적의 현관을 갖춰야 한다"고
돼 있다.

화물유통촉진법 시행령상의 냉동창고는 "충분한 내구력"을 갖추어야 한다.

쇼핑센터를 지을수 있게 하느냐 마느냐 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중의 하나는
"인근 도소매업의 균형적 발전에 미칠 영향"이다.

유가증권을 모집하거나 매출할 수 있으려면 "법규이행의 성실성과 모집
매출의 적정성"을 인정받아야 한다.

여기서 얼마만한게 "적당"한지, 어떻게 하는걸 "충분"하고 "성실"한 것으로
볼지는 공무원 맘이다.

이쁘면 그렇고 밉보이면 아니다.

명확한 기준이없으니 내키는 대로 해도 할말이 없다.

말이 법이지 바로 담당공무원이 법이고 기준이다.

이러니 사가 끼어든다.

뇌물이 오가는게 "미풍양속"으로 치부되는 것도 그래서다.

예부터 좋은 법률을 "명법"이라 했다.

속이 훤히 들여다 보여 아무라도 다 알수 있게 해야 한다는 말이다.

명법엔 공무원의 자의적 판단은 발을 들여놓을 자리가 없다.

잘 보이려고 성의를 표시할 일도, 밉보일까 두려워 몸으로 때울 일도
없다.

공무원의 수는 일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늘어나기만 한다는 법칙을
"발명"한 파킨슨은 또 하나의 법칙을 남겼다.

관청의 일은 계속 복잡한 쪽으로 발전하게 돼 있고, 이는 반드시 부패로
이어진다는 "진리"를.

관치와 부패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버리는 길은 다름 아니다.

삼청교육대를 다시 만들고 전공무원에게 도덕교육을 다시 시킨다고 될
일이 아니다.

많고 복잡하고 애매한 제도와 규제들을 바로잡아 명법으로 바꾸어 놓는게
바로 가장 약효가 뛰어난 방부제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6월 1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