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가 "민족문화의 고향"으로 각광을 받기 시작한 것은 일제때 였다.

1921년 김관총에서 쏟아져 나온 금관을 비롯한 대량의 금제 장신구는
나라를 빼앗긴 한국인들의 신라문화에 대한 새로운 자각과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당시 금관총 출토유물을 서울로 보내는 것을 막기위해 경주시민들이
돈을 거두어 창고와 진열실을 마련했다는 사실은 민족문화의 뿌리를
스스로 보호하려했던 시민들의 자긍심을 읽게 해주는 대목이다.

조용한 시골에 지나지 않았던 경주에 관광객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근대화의 열풍이 몰아쳤던 60년대에 경주시내가 급격히 확장되기 시작
하자 정부는 70년대에 들어와 경주일원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해 발전을
억제할 수 밖에 없었다.

외곽에 보문단지라는 위락촌을 따로 만들어 고도와 격리시킨 것도 바로
이때였다.

민가를 철거한뒤 고분공원을 조성하고 안압지라 황룡사지를 발굴하는등
파괴된 유적을 정화하고 보수해 70년대말 경주는 말끔히 단장한 도시로
탈바꿈 했다.

이런 시도는 경주의 역사성이 없어졌다는 비판을 면치는 못했어도 경주에
대한 박정희대통령의 개발의욕이 이 정도에서 억제된 것만도 다행스런
일이다.

합리적 문화재관리의 기본관념이나 방침이 없었던 80년대의 경주는
역사도시와 근대도시가 맞서는 이율배반성을 드러내고 말았다.

변두리에 야금야금 고층아파트가 생기기 시작하더니 병풍처럼 한쪽을
가로막아 고도의 경관을 망쳐버렸다.

그리고 지난 90년에는 고속철도가 경주도심을 통과하도록 하는 국면에
까지 이르고 말았다.

정부가 5년을 끌어오던 경부고속철 노선을 문체부와 문화계안대로
경주시를 우회해 통과하도록 하는 "건건~화천노선"으로 잠정결정했다는
소식이다.

개발논리보다는 문화유산보존원칙을 중시하기로 했다니 참으로 오랫만에
문화국 정부다운 방침을 세운것 같다.

건교부가 "10조이상이 투입되는 단군이래의 최대국책사업" "경주시민의
숙원임을 내세우며 저돌적으로 밀어붙였던 도심통과안은 돌진형 근대화를
추진하던 과거의 근시안적 구태를 벗지못한 계획이다.

경주가 지닌 문화사적 중요성은 가시적 유적.유물의 특질에도 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경주의 역사성, 자연환경 등이 유적.유물과 어우러진
역사적 분위기란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금주안에 확정될 경주고속철노선결정에 또다른 절충안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부의 이번 결정이 천년고도 경주를 민족과 인류의 유산으로 보존하는
"전통"의 신기원을 이루는 기회가 됐으면 한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5월 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