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밤마다 밀회가 한 달 가량 이어지다가 장생이 과거 준비를
위해 장안으로 올라가야만 하는 일이 생겼다.

장생의 부친이 장안에 있는 친구에게 특별히 부탁하여 장생의 공부를
지도해 달라고 하였던 것이었다.

장생은 그러한 사정을 앵앵에게 어떻게 전할까 고민하다가 떠나기
이틀 전날 밤,그 이야기를 꺼내었다.

"앵앵 낭자, 몇 달 후에 과거 시험이 있는데, 부친께서 장안에 올라가서
과거 준비를 하라 하시는군요.

부득이 몇달 간 떠나 있어야겠소"

앵앵은 장생의 가슴에 머리를 묻은 채 잠시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앵앵이 서운해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장생이 다시 입을 열었다.

"과거 시험을 보고 내려와서 앵앵 낭자의 어머님께 앵앵 낭자와
결혼하겠다고 정식으로 청혼을 드리겠소. 그때까지만 기다려주시오"

그러자 앵앵이 살며시 상체를 일으켜 장생을 지그시 내려다보며 말했다.

"과거 시험을 준비하는 동안이나 급제를 하시고 나면 마음이 달라질지도
모르니 그 이야기는 미리 하지 마세요.

도련님이 후회하실지도 모르니"

그러면서 눈물을 지었는데,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려 턱을 거쳐
보얀 젖무덤 위로 떨어졌다.

"내마음은 변함이 없을 것이오. 맹세하오"

장생이 버럭 소리를 높였지만 앵앵은 가만히 머리를 젓기만 하였다.

다음날, 그러니까 장생이 장안으로 떠나기 하루 전날 밤, 장생은 날이
새도록 앵앵을 기다렸으나 앵앵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장생은 떠나는 날 앵앵을 보지도 못하고 장안으로 올라가
몇 달을 보내었다.

그러나 난리가 일어나는 등 시국이 어수선하여 과거 시험이 예정대로
치러지지 못하고 무기한 연기되고 말았다.

장생은 일단 집으로 내려가 있기로 하고 귀향을 하여 부리나케 앵앵을
찾아갔다.

그러나 앵앵은 장생을 만나주려 하지 않았다.

앵앵의 어머니 정씨 부인도 딸의 마음을 어찌할수 없었다.

장생은 앵앵이 기거하는 서쪽 별당 근방을 배회하며 앵앵이 타는 거문고
소리만 들을 수밖에 없었다.

앵앵이 타는 거문고 소리가 어찌나 서글픈지 장생의 가슴을 저미는
듯하였다.

장생이 별당 가까이 다가가 그 거문고 소리를 좀더 자세히 들으려고
하면 어느새 인기척을 느끼고 앵앵이 거문고 타는 손을 얼른 멈추곤
하였다.

거문고 소리마저 멈춘 그 적막 속에서 장생은 안타까움에 몸을 떨었다.

생각 같아서는 하녀와 하인들이 제지를 하든 말든 방문을 밀치고
쳐들어가고도 싶었지만 차마 그렇게 소란을 피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2월 1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