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쁘시죠, 힘드시겠어요"

요즘 의레 듣는 인사말이다.

오는 4월11일 선거를 처음 치르는 지역구 국회의원 출마자의 아내인
까닭이다.

지난 88년 당시 한국개발연구원(KDI)부원장이었던 남편이 전국구
국회의원 서상목으로 과감한 직업 전환을 했을때 "정책 만들기"에 관한
그의 관심으로 인해 그럴수도 있으리라고 이해를 하면서도 마치 예기치
못했던 거센 물살에 휩싸이는 듯 불안하고 염려스러워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남편의 직업이 무엇인지 의식하지 않고 살아도
될만큼 내게는 도예가로서 확보된 공간이 있었다.

그런데 2년 반전 서울 강남구 갑지구당의 위원장직을 맡게된 이후
내 생활은 하늘과 땅만큼 달라졌다.

93년 7월말이었다.

세번째 개인전을 준비하느라 지하실에서 머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땀이 눈으로 들어가 아려와도 눈을 부빌 겨를도 없이 흙을 주무르기에
분주했었다.

느닷없이 몰아닥친 지구당 개편대회,그곳에 당원을 불러모으기 위해
태어난 뒤 그때까지 걸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전화를 했다.

더구나 당시 상황은 전임 지구당 위원장이 이 지역에 자신의 대리인을
내세우고자 해 당원 누구도 선뜻 반길수 없는 상태였던 만큼 부지런히
전화를 통해 독려해야 했기에 훨씬 힘들었다.

하지만 나름대로 분명한 목적이 있는 전화였기에 열심이었다.

당시 불현듯 모두가 평화로운 이세상 한구석에서 그와 나 둘만이
외로이 전쟁을 치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때 비로소 나는 남편이 정치인이고 그를 위해서 해야할 나의 몫이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새벽 여섯시부터 시작되는 그의 일과는 때로는 분단위로 밤늦게까지
이어진다.

주말에도 둘만의 오붓한 시간은 거의 없다.

더구나 1년5개월간 보건복지부장관을 겸임할 때에는 사무실 관리에서
부터 온갖 작은 모임과 어떤때는 공식행사까지도 내 몫이 될 때가 많았다.

집에 있을 틈이 없는 나는 미안한 마음에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입대할 날을 학수고대할 지경이었다.

때로는 밤늦게 들어서는 남편의 얼굴에서 복잡하게 얽혀있는 지역의
이야기들을 듣고는 그위에 내 사정을 차마 하나 더 보탤수가 없어서
뜬눈으로 밤을 지샌적도 있었다.

수많은 만남을 계획하고 수많은 사람을 기억해야 하고, 짧은 시간동안
좋은 인상을 남겨서 그것을 정으로 연결시키는 일은 시간과 정성뿐만
아니라 혼이 요구되는 작업이 아닐까.

불현듯 일정없는 생활이 그립고 세 식구만의 자유로운 작은 행복이
아쉬울 때가 있다.

누구에게나 한결같은 그사람. 어떠한 경우에도 치우치지 않고 언제
되돌아 보아도 항상 제자리에서 우리 가족 곁에 있었던 그사람.

언제나 자신을 객관화 할 수 있기에 비범함 중에도 항상 상식을 잃지
않는 그사람.

어쩌면 그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바른 길을 가고 있다고, 그러니 나의
작은 욕망 정도는 한켠에 고이 접어 두라고 스스로를 추스려 본다.

행복이란 무엇일까? 주어진 현실에 감사하면서 행복하고자 최선을
다하는 노력 그 자체가 아닐까.

아침이면 거울에 비쳐지는 내 모습을 본다.

남이 보게될 나의 모습은 내가 보는 나와 같을까.

어떻게 하면 처음 만난 두 사람이 서로 좋아한다는 아름다운 감정을
공유할수 있을까.

끝없이 내면을 파고 들어가 나만의 오붓한 표현을 찾고자 애쓰던
나는 이제는 여러면에서 되도록이면 남의 눈을 의식하고 그들의 잣대에
맞추고자 노력한다.

아무리 바쁘고 아무리 힘들면 어떠랴. 사랑보다 더 깊은 신뢰를 마음에
간직한채 오늘도 이렇게 조아려 본다.

유행가 가사처럼 "난 네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한국경제신문 1996년 2월 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