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옥이 대옥을 간신히 달래어서 연극이 공연되는 뜨락으로 다시
데려오니 보채가 청해놓은 "노지심이 술에 취해 오대산을 소란케
하다"라는 극이 무대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보채가 보옥이 어디로 갔나 하고 둘러보다가 보옥을 발견하고는
손짓으로 불렀다.

보옥은 대옥의 눈치를 보다가 대옥이 가보라는 눈짓을 하자 대옥을
향해 빙긋이 웃어주고는 보채 옆으로 와 앉았다.

보채는 아까 하려던 이야기를 보옥의 귀에다 대고 소곤소곤
해주었다.

"저기 보세요. 노지심이 술을 마시면서 노래를 부르는 장면
말이에요.

점강순의 곡조로 꺾어 넘기는 소리가 절묘하잖아요.

음률의 높낮이가 조화롭기 그지없고요"

아닌게 아니라 보옥이 들어보니 노래가 보통 다른 연극에서 듣던
그런 종류가 아니었다.

북방곡조의 일종인 점강순의 묘미가 한껏 살아있는 노래요 연극이라
아니할수 없었다.

그리고 그 다음 장면이 어떻게 이어질지 궁금증을 자아내었다.

기대도 하지 않다가 진흙속에서 진주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정말 기가 막히데"

보옥이 입을 헤 벌리고 노지심역을 맡은 배우가 부르는 노래 소리에
홀려 있었다.

"저 노래는 다음 장면에서 부르는 "기생초"라는 노래에 비하면 또
아무것도 아니죠.

기생초는 특히 가사가 빼어나지요"

보채는 은근히 보옥의 호기심을 부추겼다.

보옥은 다음 다음 장면까지 기다릴수 없어 보채에게 그 "기생초"라는
노래의 가사를 들려달라고 하였다.

보채가 옆에서 연극을 구경하는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낮은
목소리로 그 가사를 들려주었다.

영웅은 눈물에 흠뻑 젖어
처사의 집을 떠나네
부처의 자비에 감사하여
불상 앞에서 머리를 깎았건만
승려의 길과는 인연이 없어
또다시 총총히 떠나는 몸
홀로 적막하기 그지 없어라
이제 어디로 갈거나
도롱이에 삿갓 쓰고
떨어진 짚신 깨어진 주발
타고난 인연 따라 동냥길에나 올라라

보옥은 그 가사를 듣고 감탄한 나머지 무릎을 손바닥으로 치기까지
하였다.

보채와 보옥쪽이 약간 손란스러워지자 기회를 놓칠세라 대옥이 한마디
던졌다.

"좀 조용히 해요.

아직 노지심이 술에 취해 절간 문을 부수는 장면도 시작 안했는데
벌써부터 절간을 떠나는 대목을 읊다니 머리가 어떻게 된거 아니에요?"

(한국경제신문 1996년 1월 1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