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인지상이라는 지존의 자리에 있던 조선왕조의 역대왕에게는 자기권위에
도전하는 자들의 행위에 대해서는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일일지라도 참지
못하는 속성이 있다.

성군으로 꼽히는 성종도 예외는 아니다.

성종8년(1477)여름, 당시 승지였던 현석규와 홍귀달이 사소한 일로 옷소매
까지 걷어붙이고 언쟁을 한 일이 있었다.

아무것도 아닌 이 사소한 사건의 조정에 알려지자 대간들의 두 승지의
파직을 촉구하고 나섰다.

그러나 성종은 엉뚱하게도 현석규의 자급을 두 단계나 뛰어올려 대사헌
으로 임명했다.

현석규가 종실의 사위였고 총애하던 신하였기 대문이기도 하지만 대신들이
자기의 명을 어느정도 따르느냐는 시험해 보는 속셈에서 취해본 조치였다.

그 결과는 예상보다 훨씬 더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현석규의 승진에 반대하는 대간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났고 철석같이
믿었던 원로 중신들의 의견도 그쪽으로 기울었다.

성종은 내친김에 또 한번의 극한처방을 써서 현석규를 "소인"으로 몰아
붙인 간관 김언신을 "임금을 기망한 죄"로 의금부에 하옥시킨다.

의금부에서 김언신의 죄가 "장100대, 도3년"에 해당한다고 조율해올렸다.

성종이 "임금을 기망한 죄는 죽여야하는데,너무 가볍다"고 재조율까지
지시하자 다시 반대상소가 빗발치듯하고 정국은 더큰 혼란속으로 휘말려
들었다.

이 사건을 마무리하는 성종의 술수는 놀랍다.

김언신을 승정원뜰에 불러낸 성종은 "지금 네 죄가 죽기에 이르렀는데도
여전히 현석규를 "소인"으로 여기느냐"고 물었다.

그가 "현석규는 참으로 "소인"입니다"라고 대답하자 죽음앞에서도 굴하지
않는 그의 강개함을 칭찬하면서 술까지 대접해 석방해버렸다.

"김언신을 하옥한 것은 중모를 물리치고 쟁을 막는 것이 아니라 실로
다른 뜻이 있었다" 성종은 뒤에 이렇게 술회했지만 그의 "다른뜻"이
무엇이었는지는 아리송할 뿐이다.

최근 외국언론들이 한국의 정치상황을 나름대로 분석해 보도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한국은 권력과 연장자들에 대한 비판을 금기시하는
유교사회인데 오랜 부패와 탄압이 정의에 대한 불을 붙였다"는 어느
주간지의 기사는 자못 인상적이다.

국민들이 정의에 불타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지도자들은 아직 아무도 모르는 "다른뜻"을 가지고
있는것 처럼 보인다는 것이 문제다.

아마 그것이 해묵은 "유교의 전통"인지도 모르겠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2월 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