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들어 지난 9월까지 어음부도건수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2% 늘어난
1만2백건이라는 게 한은의 발표다.

이는 작년의 총부도건수(9천8백여건)보다도 많은 것이어서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따른 어음부도율도 0.16%나 된다.

어음부도율도 부도건수와 유사한 증가율을 보였다.

중소기업의 도산건수도 약 30%나 늘었다는 중소기업중앙회의 발표와도
맥을 같이하고 있다.

지금 부도가 나고 도산하는 기업들은 거의 노동집약적인 산업에 속해 있는
것들이다.

한국의 임금은 영국보다 40%나 높다.

중국을 비롯, 한국 임금의 5분의 1도 안되는 동남아 여러 나라로부터 헐값
상품들이 수입개방화의 물결을 타고 밀물처럼 들어 오고 있다.

우리 중소기업들이 견뎌내지 못하고 쓰러지는 것은 불가피한 사정이라 할
수도 있겠다.

관계당국자들은 어음부도율이 이처럼 급증하는 것을 불가피한 것, 불가항력
적인 것으로만 돌리지 않으려는 듯이 보이려고 중소기업들의 구제.보호.육성
을 외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중소기업 대책은 목소리에 비해서 그 성과가 미약하다는
점은 앞서 열거된 수치에 의해 역력히 드러나고 있다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메아리 없는 헛소리만 지르는 따위의 중소기업대책은 그만두고 알맹이 있는
중소기업 대책이 나와야만 할 것이다.

대책도 종래처럼 백화점식으로 늘어 놓기만 하다가는 죽도 밥도 안될
것이다.

따라서 우선 순위를 정해서 집행해야만 한다.

또 여러가지 대책중에서는 무엇보다도 중소기업의 자금난 해소책이 최우선
순위를 차지해야만 한다는데 이의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관계당국은 중소기업이 직면한 위기가 중소기업 자신들의 하자와 개방화
라는 운명적 환경악화가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것이라고만 강변하고 있다.

이에 못지 않게 유명무실한 중소기업 정책과 대기업 일변도의 금융풍토
(패러다임)가 중소기업들을 도산의 궁지로 몰아내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려
하고 있다는 느낌도 든다.

역대정권들의 중소기업 정책이란 천편일률적인 것이어서 좋은 것은 모두
다 하겠노라고 했다.

따라서 정책이 이뤄지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은 애초부터 뻔했다.

물론 문민정부의 그것도 예외는 아니다.

금융분야에 있어서도 중소기업은행과 국민은행을 제외하면 모든 금융기관
들이 대기업 금융에만 열을 올렸고 융자의 35%는 중소기업에 주라고 하는
정부 지시마저 어기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기에 진정 중소기업들을 살리려면 중소기업들의 자체적 잘못과 수입
개방에 따른 운명적 환경악화등만을 탓하지 말고 중소기업들이 도산하는
가장 큰 이유라고 할 수 있는 자금난(전체 부도이유의 44%) 해소책에서부터
착수해야만 한다.

즉 중소기업의 유통금융을 적극화하는데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금융의 기형성은 유통금융이 없다는 데 특징을 지니고 있는 만큼 유통
금융의 주축인 상업어음할인(상품담보대출)이 거의 금기시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와중에서 중소기업 종사자들은 수표 어음부도를 막으려 쫓아다니는
데만 온갖 정열과 시간을 소비하고 있다.

때문에 성인.성력등 경영합리화에 힘쓸 겨를이 없는 실정이다.

그래서 중소기업이 잘 굴러가고 있는 일본 대만등은 한국에게 타산지석이
아닐 수 없다.

이들 나라에서 상업어음 할인을 주축으로 한 유통금융은 대출전체의 80%를
차지하고 있다.

이같은 점에서 중소기업 위기 탈출문제는 은행대출을 전반적으로 재검토
하는데서 출발하지 않으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라고 잘라 말할 수 있다.

더군다나 금융실명제 실시때문에 사채시장의 자금공급을 80%나 담당하고
있던 검은돈들이 제도금융권 안으로 유입되도록 강요당하고 말았으니 사채에
의존하는 중소기업들의 자금난이 사경에 다다라 어음부도율이 0.16%까지
치솟았다고도 볼 수 있다.

이는 실명제 실시전 평상시의 0.04%의 무려 4배나 되는 수치이다.

금융실명제 실시와 병행해서 이뤄졌어야만 했을 중소기업 대책의 부재를
탓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중소기업의 자금난 해소책은 중소기업 금융문제만 가지고 마련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금융분야 전체의 문제로 다뤄져야 할 것이다.

여기서 가장 큰 걸림돌은 인플레 문제다.

꼬집어서 말하자면 통화량의 한도를 얼마나 늘리느냐 하는 문제에
부닥친다.

부연하자면 요즈음 통화량의 증가한도를 약 16%정도로 여기고 있는데 이는
상업어음등 유통금융은 안 한다는 전제하에서의 통화관리 목표인 것이다.

중소기업을 살리기 위해선 상업어음할인등 유통금융을 해준다는 틀에서
통화관리도 이뤄져야 한다는 것인데 그러자면 통화증가한도를 늘려야 할
것이다.

아마도 20%를 훨씬 넘겨야 할런지도 모르며 그경우 인플레-물가고 문제가
뒤따를 것이다.

이점에서 통화당국이 유통금융을 적극화하는데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까닭을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음부도율 0.16%라는 사태를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장바구니 물가와 공공요금등 종합적인 물가대책과 함께 하루빨리 단안을
내려야만 할 때라고 생각한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2월 7일자).